수요일엔마프 #27 글 중에
의정부는 올해로 법정문화도시 2년차를 맞았다. 2019년 하반기에 의정부문화재단을 설립한 이후 예비문화도시 선정(2022년)에 이어 2023년 경기북부지역 최초로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었다.
의정부가 예비문화도시에 선정된 해인 2022년은 문화도시 시민협의체인 문화시민네트워크(이하 문시넷)가 발족한 해이기도 하다. 문시넷은 지방선거를 앞둔 5월, 지방자치의원과 시장 후보들을 초대하여 시민이 제안하는 문화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제안된 17개의 문화정책은 의정부 문화도시가 진행한 네 차례의 시민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한 612명의 의견수렴 결과물을 토대로 문화도시지원센터와 문시넷이 함께 발굴한 것이다.
시민의견을 바탕으로 도출된 5개 주제별 17개 정책에 대한 시민 선호도를 한 달에 걸쳐 조사한 결과, 가장 높은 선호도를 보인 것은 '시민문화공간 확대 및 민간공유공간 활성화(26%)' 영역의 정책들이었다. 공간과 관련된 시민들의 요구는 이미 2년여에 걸친 의견수렴과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부분으로, 의견수렴 기록물에서 도출한 17개의 정책들 중 5개가 공간과 관련된 것이었다. 참여한 시민(총 276명) 4명 중 한 명은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확대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한 것이다. 의정부문화도시지원센터는 공간에 대한 이러한 높은 수요를 바탕으로 문화공유공간 지원사업을 설계하고, 지난 3년간 총 52개(2022년 12개, 2023년 24개, 2024년 16개)/연속지원 9개 포함)의 공간 사업을 지원하였다.
의정부문화도시의 문화공유공간 지원사업은 다양한 공간에서 시민들이 문화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으로서 작은도서관과 같은 비상업 공간 뿐 아니라 책방, 카페, 스튜디오, 작업실, 공방, 학원처럼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일상적 상업공간을 모두 아우른다는 특징을 지닌다. 매해 선정되는 공간의 80% 가량이 상업공간일 만큼 영리공간의 지원과 선정률이 높은데, 이는 주로 비영리 단체나 공간을 지원하는 기존의 공간지원 공모사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또한 공간 운영자들이 서로를 인터뷰하고 비용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 점이나 시민들이 해당 공간을 이용할시 대관료를 공간에 지급하는 등 민간 공간에 대한 타 정책사업과 다른 시도들을 해나가고 있다.
의정부 문화도시의 공간지원 사업은 지난해부터 ‘사이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공간 이용자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시키는 프로그램 지원을 넘어 공간과 지역사회, 공간 운영자와 방문객, 공간 이용자와 이용자 사이의 관계를 잇는 장소로서 확장해나가는 것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높은 인구밀도를 가진 도시에서 의미 있는 지속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님은 이미 수많은 마을공동체 사례들들 통해 증명된 바 있다.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불러 온 촌락 공동체의 붕괴는 친족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강력한 연대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켰다. 대도시는 파편화된 개인주의의 요체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가 문화적 다양성을 촉진하고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익명적 군중성이라는 속성 덕분이다. 강력한 공동체나 조직의 소속이 없는 도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려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형태들이 태어난 것이다.
도시 공간의 유형이 갈수록 다원화되는 것도 이러한 현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공공 기관에서 시민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공공 기관뿐 아니라 거리, 공원, 광장과 같은 다양한 공적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자체나 중간지원조직의 공모사업을 통해 개인이 운영하는 공간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공적 공간과 닫힌 공간으로서의 사적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된 셈이다. 의정부문화도시의 ‘사이공간’ 도 개인의 영리공간이 어떻게 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공공이 서로 다른 유형의 사적 공간을 지원하는 이유는 이러한 공간들이 시민의 일상과 문화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요소로서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하는 건축학계의 정의와 달리 사회학계에서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은 서로 다른 성격의 공간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유하고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과 공간이 연결과 네트워크의 매개로서 접근한다는 뜻이다(2011, 안현정). 인간의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던 아렌트에 따르면, 세계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분리시키기도 한다. 사물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는 공간 역시 그렇다. 때에 따라선 사람들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행위자의 의도에 따라 타자와 접속하고 관계를 잇게 만든다. 공간과 사람을 잇는 놀라운 힘은 운영자와 이용자 간의 관계 맺기를 통해 형성되기도 하고, 공간에서의 문화적 경험에 의해 생성되기도 한다.
9년간 의정부 신곡동의 주민커뮤니티공간으로 운영되었던 ‘마을북카페 나무(2013~2021)’ 이용자들의 구술기록은 공간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 뿐 아니라 활동을 촉진하고,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잇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안은성, 2022).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을북카페 나무의 아카이빙을 위한 구술기록(의정부문화도시 거점공간지원사업, 2021)에 참여한 스물 한 명의 주민들은 매주 한 번씩 만나는 소모임을 통해 공간 운영자 및 회원들과 관계를 맺어왔던 이들로 함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집에서 가져 온 음식을 같이 나누는 문화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낯선 타자들이 공간에서의 지속적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어쨌든 간에 4년이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이 공간이 없었으면 할 수 없던 거죠. 왜냐하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공간이 있으니까.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줄 수 있는 곳이 이 공간이 아니었나 해요.(마을북카페 나무 기타 소모임, U, 2021)
저는 원래 여기 토박이가 아니라 아이 낳으면서 의정부로 왔잖아요. 아는 사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소모임하고.. 그러면서 의정부 사람들과 관계가 지금 많이 확장된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이곳에 대한 좀 약간 소속감? 의정부 사람이 된다는 그런 소속감을 느낀 거 같아요. (마을북카페 나무 운영위원, K)
저는 지역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다른 카페들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잖아요. 예전에는 의정부를 그냥 잠깐 스쳐가는 도시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런 모임을 하고 또 마을 분들을 만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고. (글쓰기 모임, K)
대도시에 있었을 때 전혀 몰랐던 개념 그리고 전혀 생소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경험이 공동체라는 개념이었거든요. 그리고 지역의 의미 이런 거 진짜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근데 여기 의정부로 와서. 천만의 대도시에서 40만의 소도시로 와서 공동체를 알게 되고. (영화대본읽기 모임, Y)
‘마을북카페 나무’는 9년동안 총 17개의 소모임을 운영하였는데, 개별 소모임은 구성원이 대여섯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공간 운영자는 100명에 달하는 소모임 회원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2021년 겨울 재개발로 문을 닫게 된 마을북카페 나무가 공간의 부고를 지역사회에 알리고 3일간 장례를 치룬 것은, 이렇게 공간을 통해 맺은 무수한 관계들과 작별하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간이 준 특별한 느낌과 정서는 물리적 요소로 구성된 공간 이상의 의미를 주게 되는데, 그럴 때 우리는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여기게 된다. 장소에서 느끼는 정서, 즉 ‘장소성’은 ‘공간에서 느낀 임팩트가 클수록 공간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드 렐프는 “인간이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Edward Relph, 2005)”라고 설명하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는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장소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는 장소를 경험하는 이의 공간적 위치다. 해당 장소를 내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 외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에 따라서 장소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이 장소의 내부와 깊이 연결되면 그와 장소와의 동일시가 강해진다. 이러한 정서는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렐프가 강조한 장소와의 강한 연결성을 생각해보면, 내부인인 공간 운영자와 외부인인 이용자가 어떻게 관계 맺으면 좋을지를 예측해볼 수 있다. 공간에 방문해서 단기적인 프로그램이나 이벤트에 참여하고 떠나는 외부인은 그 공간이나 운영자와 깊은 상호작용을 할 겨를이 없다. 지속적 관계 맺기 없이 짧은 시간동안 공간에 머물기 때문에 장소 정체성을 형성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외부인이더라도 지속적으로 운영자와 소통하면서 내부와 깊이 연결되는 사람이 공간에 대해 특별한 친밀함과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관계 맺기를 통해 개인이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만든다면, 장소 역시 다른 곳과 차별되는 장소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공간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공간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Yi-Fu Tuan, 1977). 우리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어떤 장소를 찾아 가거나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외부인으로서 첫 발을 들일 때 낯설고 추상적이던 공간은 그 안에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깊어질수록 의미 있는 구체적 장소로 변화해간다. 장소가 만들어진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 팀 크레스웰의 해석처럼, 어떤 공간을 우리가 알아가는 과정은 결국 공간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과정인 것이다(Tim Cresswell, 2004).
일찍이 미셸 푸코는 현 시대가 공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시간을 통해 길게 전개되는 삶이 아니라 ‘여러 지점을 연결하고 그 실타래를 교차시키는’ 연결망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Michel Foucault, 1994).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진 삶이 아닌, 개인과 개인을 잇는 수많은 공간의 교차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의정부문화도시의 사이공간뿐 아니라 경기도 내 수많은 마을공동체 공간들은 지금도 무수한 익명의 개인들을 교차하게 만드는 연결망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인 관계 맺기와 상호작용으로 차별화된 장소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공간 운영은 일정 수준의 물리적 시간과 비용, 노동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간과 장소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관계 맺기와 상호작용의 주체-공간 운영자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본 글은 공간의 관계 맺기와 장소성에 대한 고찰이 목적이므로 마을공동체 공간을 비롯한 공간 운영자들이 펼치는 활동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추후 기회가 되면 논하고자 한다.
오늘도 씨줄과 날줄로 일상의 관계망을 엮어가는 많은 민간공유공간과 공간 운영자들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안은성 지역자산화협동조합 팀장
안은성, 2022, 민간 커뮤니티 공간의 특성에 관한 사례 연구-경기도 의정부시 마을북카페 나무의 변천을 중심으로
안현정, 2011, 도시 환경에 있어서 사이공간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연구. 기초조형학연구, 12(1), 335-348 참조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 1976,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역. (2005)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pp.116~ 128, p.298 참조
이-푸 투안(Yi-Fu Tuan), 1977, 윤영호·김미선 역. (2020) 『공간과 장소』, 사이, p.19 참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94, 이상길 역. (2014)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p.41 참조.
팀 크레스웰(Tim Cresswell), 2004, 심승희 역. (2012) 『짧은 지리학 개론 시리즈 : 장소』, 시그마프레스, 역자 서문ⅸ 참조.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이진우·태정호 역(2008), 『인간의 조건』, 한길사, pp.102~1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