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어렸을 적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은 꽤 확고했다. 손끝에서 울리는 음들은 때로는 제각각 개성을 뽐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로 어우러져 내 안에 있던 감정들을 빛나게 해 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피아노를 치고 나서 놀이터에 가는 것이 어린 시절의 일상이었다.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음악이 좋았다. 그럼에도 굳이 이유를 찾자면, 피아노는 내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남들에게 쉽게 터놓지 못한 이야기를 선생님께 조심스레 말한 적이 있었다. 응어리져있는 마음을 단순히 몇 분 동안의 말로 온전히 표현될 리 없었다.
“제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실 거예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선생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내가 이해한다는데 뭘 모른다고 하니!”
오히려 역정을 내는 선생님은 나를 더 궁지에 몰리게 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때 느꼈던 무력감은, 내가 말로는 내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말로 소통하지만, 그 말들이 내 안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피아노는 나에게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을 통해 공통된 무엇을 떠올리며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버려지거나 묵살되는 정보들도 많다. 예를 들어, ‘컵’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어떤 사람은 투명한 유리잔을 떠올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플라스틱 머그잔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차이는 종종 간과되곤 한다. 이러한 점에서 말은 효과적인 의사전달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최대한 세밀하게 표현하려 해도, 정제되어 언어로 가공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말은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최고의 도구가 아니었다.
물론 텍스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과 친하지 않은 시간이 꽤 길었다. 그런데도 책 속에서 언어로 상상을 자극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깨달음을 책 한 권으로 배우고, 또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책 속에 그대로 담겨 있을 때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책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언어를 알아야 한다. 물론 음악도 숨겨진 의미를 깊이 알기 위해서는 음악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텍스트는 언어를 모르면 전혀 소통할 수 없지만, 음악은 감정을 공유하고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음악의 진짜 매력이 가려질 수 있다. 감각적인 이 대화는 감정을 느끼고 감동적인 경험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감동은 각자의 가슴에 닿아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이게 바로 음악이 주는 특별한 힘인 것 같다.
음악은 각자의 가슴에 닿아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가장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그릇 아닐까?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 말이다. 피아노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듯 음악은 매 순간 새롭게 나에게 다가온다. 손끝에서 울리는 음들은 그 자체로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하고, 그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연결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내가 지금껏 피아니스트라는 길을 걸어가는 단 하나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