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였다. 베드로를 비롯해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도망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왜 하나님은?"이라는 무거운 바위와 같은 질문에 짓눌린 채 염원의 사망을 장례 치렀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악은 악이기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아버지이기에 죽음의 위기에 놓인 아들을 위해 대신 죽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악의 실존 앞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죽음을 피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 그 죽음을 성부 하나님은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이라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셨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살리는 대속적 죽음이기에 그 따르는 자들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약속의 징표가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수많은 죽음은 대속적 죽음으로 그 제자도를 완성한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로 생명의 약속을 얻었고 그 사실이 예수를 위한 죽음으로, 또는 예수님을 인한 죽음으로 증명되어 증거 하는 자의 사명을 다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놓여있다. 민주주의를 대속할자가 누구인가? 누가 파국을 대신 맞이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지 않을까? 생명을 예수의 대속과 부활로 약속받아 그의 백석 됨을 영광으로 여기는 이 땅의 존재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아암으로 죽음을 앞둔 한 소년의 인터뷰를 보았다.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니? 왜 하필이면 네가 선택되어 이런 병을 얻었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니?"라는 질문에 소년은 "나의 동생들이 아닌 내가 선택되어 병에 걸린 것, 그래서 내가 죽게 되니 다행이라 원망스럽지 않아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켜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게 해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세워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자의 무력 앞에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죽으셨듯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그 무력에 대신 죽을 자는 교회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본받는 하나님의 백성, 죽임 당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생명의 약속을 그 죽음으로 선전한다. 한국교회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두를 살리는 대속적 죽음을 위해 교회가 그토록 믿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된 존재라면 소아암 소년과 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믿음이 있는가? 그 소년은 자신의 죽음을 구원으로 수용했는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과 같이 교회는 자신의 파국을 구원으로 인정할 믿음이 있는가?
파국을 직면한 이때, 교회는 발가벗겨지고 비난받고 채찍에 맞고 뺨을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파국을 영광으로 받는 생명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로 기도할 때이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와 같이 완전무결함에도 희생되는 죽음은 아니겠지만 대속적 죽음에 믿음으로 참여하기에 예수와 같은 죽음을 향해 그 골고다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오르는 길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죄로 수치러울 수밖에 없는 파국적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으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파국적 골고다로 화하길 예수께서 흘린 대속의 보혈의 효험을 믿으며 겸허하게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