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 기능이 그저 몸무게 측량에서 이제 비만도 측량까지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수치와 객관으로 불확실성과 싸우려 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객관적 수치가 아닌 이른바 "눈바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비만과 건강 상태를 눈으로 보아 감각하는 방식을 더 신뢰하는 추세이다. 이렇게 객관의 권위는 일상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수치가 절대성을 잃었다고 해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백과 조금의 애누리로 절박함과 위기감으로부터 해방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전에는 정확히 아는 것을 일종의 구원의 길로 여겼지만 이제는 측정의 정확성의 불가능과 한계를 경험했기에 불확실성과 함께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인류에게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다. 더 많은 세월을 인간은 불확실성과 친구하며 살아 왔다. 2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2시 10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면 오는 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 불확실성이 창출한 빈공간을 믿음으로 채웠다. 때론 믿음에 배신을 당하기도 하지만 더 이해하려 상대의 입장을 숙고하였다. 이런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수치와 객관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렇게 정교하게 채워진 빈공간이 분명히 꽉채워졌음에도 온기가 없고 빈공간이 주는 공허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수치와 객관적 지표를 거둬내고 빈공간을 그냥 여백으로 남겨두었을 때 비로소 창조성이라는 인간의 새로운 오래된 기능을 되찾게 되고 용납과 수용이라는 여유가 발효된 사우어브레드 도우와 같은 깊은 맛과 향이 주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는 객관은 더이상 권위가 아닌 권력으로 변질되었고 우리는 영혼을 빼앗기고 당당함을 상실하여 존재론적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객관에 배신 맞은 것이다.
신앙의 영역은 이 배신감은 더 심각한 것 같다. 신앙의 정도를 종교 프로그램 이수와 활동치로 환산 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지표라는 객관과 수치의 권력이 작동한 것이다. 신앙은 그렇게 상품가치 매겨지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하여 신앙계에도 계급이 형성되었다.
위험사회의 저자인 울리히 백의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신앙을 비로소 교회로 찾아 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근대는 신앙을 교회에서 개인이 찾아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탈근대, 울리히 백에 의하면 새로운 근대 또는 성찰적 근대에는 신앙은 어디에 도달한 것일까? 아마도 신앙은 신앙 그 자체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신앙을 수치와 객관이 아닌 그 자체로 주체가 되어 교회와 제도가 신앙을 해방시켜 준 것이 아닌 신앙은 신앙으로 해방되어 가고 있는 여정이지 않을까... 그 어떤 지표로도 그 어떤 의도로 오염되지 않는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본질인 신앙을 향한 신앙해방의 여정 말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은 인간으로 극단적 보수성을 추구하게 하는 것 같다. 불확실성을 무질서와 동격으로 여겨 극도로 혐오한다.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허구적 위기에 눈깔을 뒤집는다. 어떤 사안에 대해 확실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사안이 무질서 하다는 결정하는 것은 계보학적 판단이 낳을 수 있는 오류의 답습이지 않을까. 이런 오류는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질서를 회복하고 볼안감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강박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사실 불확실한 대상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인식의 무능이 문제이지 대상이 문제이지 않을 수 있다. 그 대상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한 합리성이기에 시비와 가불의 대상이라는 실체로 성립해 왔던 것이다. 불확실성은 자연스러운 실체이고 거부하지도 말아야 하고 거부할 수도 없는 실존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불확실성과 함께하는 여정은 우리에게 본연의 그 무엇, 우리의 보통의 인식 넘어에 있는 신비를 경험 또는 감각하게 한다.
사방팔방이 막혀 있다고 느껴지는 작금의 현실에 숨통을 열어 줄 새로운 길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환영하여 포옹할 때 그 뒤로 열릴 것이다. 그것을 모가지를 겹쳐 진심으로 끌어 안지 않으면 우리는 불확실성 등뒤를 볼 수 없다. 불확실성에 대한 편견을 내려 놓고 불확실성을 끌어 안아 가슴으로 느껴 보면 그것을 느끼는 주체 마다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수치와 객관의 지배 방식으로 얻은 획일적인 확신이 아닌 모두에게 경험되는 특별한 확신, 그 확신들이 제각각이겠지만 알 수 없는 질서 가운데 유기적 연대로 하나의 확신의 갤럭시가 형성되는 우주가 열리는 장엄한 새시대, 회의주의가 시대정신이라 할지라도 회의감에 잡아 먹히지 않고 생존한 나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일없이 거창한 기대와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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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여행 중인 아들이 보내 준 사진을 감상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