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경안고가 개교(1995년)하고 이듬해인 1996년 12월. 교사 임용 공채 필기시험이 있던 날, 나는 시험 중간 휴식 시간에 본관 건물 3층 제일 끝 발코니로 나갔다. 긴장한 탓인지, 시원한 공기가 그리웠다. 밖에는 마치 동화 속 장면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달재원 건물(기숙사)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가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개교한 지 이제 겨우 2년째 접어든 신생 학교는 그때의 내 눈엔 마치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이토록 새하얀 도화지에 나의 색깔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작은 바람을 가슴에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기적처럼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너무 기뻐서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그동안의 고단함과 설움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도 이미 아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걸까. 나의 등을 토닥여 주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아들... 애썼다. 그간 정말 마음고생 많았지? 절실하게 갈구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단다. 넌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 될 거야.”
어머니의 눈물도 뺨을 타고 흘러, 내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이렇게 나와 경안고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사장실에서 정교사 임명장을 받던 날. 백발이 성성한 설립자 권달안 이사장님(당시 77세)이 내가 입고 있던 양복 가슴 깃에 금으로 만든 경안고 배지를 달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제가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 학생들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명문고 만들어 주세요.”
그 순간 나는 배지를 어루만지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제 청춘을 바쳐 반드시 명문고 만들겠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어느덧 내 나이도 환갑을 바라보고, 2025학년도를 마지막으로 퇴직한다.
그 30년 동안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배지를 달아주셨던 초대 이사장님은 2002년에 타계하셨고, 그해 두 번째 이사장님이 취임하셨다.
일곱 분의 교장 선생님, 여덟 번의 정권 교체, IMF의 한파, 디지털 혁명과 AI 시대의 도래까지. 그 모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는 ‘경안’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세상이 거칠게 흔들릴 때에도 안정적인 자리에서 단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다.
바로 금배지와의 약속.
처음 경안을 만난 날, 눈 내리던 풍경과 이사장실에서 배지를 받던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초심을 잃을까 봐, 약속을 잊을까 봐, 일부러 더 오래 붙들어 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양복을 입는 날이면 내 가슴에는 어김없이 금배지가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내게 초심을 상기시켜 주는 일종의 ‘의식’이었고, 나를 다시 교실로 돌아가게 하는 작은 빛이었다.
나는 경안고를 사랑한다.
나를 밥 벌어먹게 해준 직장으로서도, 애교심으로도 사랑하지만, 내게 경안은 나의 청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잘 나가면 나도 어깨가 으쓱했고, 학교가 위기를 맞을 때면 나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뭐가 그리 대단한 거라고, 부질없다고, 당신이 유별난 거라고...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경안이 아니어도 다른 학교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던 그런 ‘능력자’가 아니었다. 임용이 안 되었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선생님’이라는 근사한 호칭을 붙여준 이 학교가 고마웠다. 그리고 제자들이 나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곧 나의 청춘을 빛나게 할 수 있다고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교사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절실했고, 그래서 더욱 진심이었다.
임용 첫해부터 담임을 맡아 아이들과 동고동락했다. 일본어 교사였던 나는 틈틈이 교재를 집필하기도 하고, 방학이면 서울 일본공보문화원까지 가서 일본인 교수에게 교수법을 배우기도 했다. 재미있는 수업을 하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연수를 찾아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일 남아 아이들과 상담했고, 여름방학 때면 우리 반 아이들만 데리고 충북 단양으로 2박 3일 MT를 다녀오기도 했다. 계곡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하고, 산에도 오르고, 물고기 잡기 대회도 했다. 잡은 물고기를 일일이 손질해 큰 솥에 매운탕을 끓여 놓으면 아이들은 며칠을 굶은 녀석들처럼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지금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돌이켜보면 그땐 나도 젊어서 겁이 없었던 것 같다.
비평준화 시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밤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홍보했던 날들. 매년 맑은 가을 토요일, 경안고 학교설명회가 있는 날이면 1,200여 명의 중3 학부모와 학생들이 체육관 강당 1, 2층을 꽉 채웠다. 설명회가 끝나면 학부모들은 각 교실로 흩어져 우리 선생님들과 진학 상담을 하고, 중3 학생들은 경안 재학생들에게 이끌려 교정 곳곳을 투어하며 설명을 듣는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학생들의 학업 니즈를 채우기 위한 사회과학자반, 과학영재반, 영어영재반, 텝스반 등의 방과 후 프로그램. 주한미대사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아이들에게 세상의 넓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시간들. 더불어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어 만들었던 배움나누미와 행복나누미 봉사단.
‘멋있게 살아가자’라는 교훈처럼 삶에 대한 낭만과 열정을 보여주고 싶어 결성한 경안고 교사 록밴드 KTB.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을 위해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한 수업 연구 동아리 수업나래. 갑작스러운 평준화 이후, 기숙사 부장을 맡아 5년 동안 기숙사 학생들과 동고동락했던 일들. 다른 학교로의 파견 근무. 또 그 시련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집필했던 에세이(내 속엔 작고 소심한 아이가 산다) 출간. 아이들에게 춤을 배워 함께 찍었던 뮤직비디오 2편. 그리고 미담 릴레이를 엮어 만든 두 번째 에세이(선생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 출간까지. 모두 값진 추억들이다. 나는 그렇게 하나하나 나의 색을 입혀 갔다.
마치 그 색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교정의 영산홍과 매화, 목련은 봄마다 꽃망울을 틔웠고, 가을이면 감나무에서 탐스러운 주홍빛 단감이 영글었다. 나도, 경안도 그렇게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덧 경안의 나이도 서른 살이 되었다. 나도 경안도 함께 자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열정이, 내 청춘이 아름다운 색으로 이 교정 한 귀퉁이에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믿어 본다.
공자(孔子)도 서른에 이르러 비로소 뜻을 확고히 세웠다 하지 않았던가. 이제 경안은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강건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건학이념의 기반 위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 멋진 일을 동료 후배 선생님들이 자신들만의 색으로 또 한 번 새롭게 칠해 나갈 것이다. 많은 제자들 또한 각자의 아름다운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겠지. 그래서 떠나는 나의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지금 다시,
가슴에 달린 금배지를 어루만지며 묻는다.
‘너와의 약속, 나는 지켰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30년 동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심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금배지는 내가 사랑하는 후배 교사의 가슴에서 또 다른 약속이 되어 계속 반짝이고 있을 거라는 것. 앞으로 50년, 100년이 흐른 먼 훗날에, 나는 가고 없어도 경안은 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색깔로 자신을 예쁘고 아름답게 물들일 것이다. 그야말로 멋진 풍경이 될 것 같다.
“Adiós, Hasta la vista 경안!”
“내 청춘의 낭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