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환송연

주저리주저리

by 장교주

2026년 2월 25일.

나는 두 번째 환송연을 받았다. 첫 번째는 잠시 떠남이었고, 두 번째는 영원한 떠남, 퇴임식이었다. 시청각실 맨 앞에 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느껴졌다. 동료 교사 한민호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 나와 원고를 펼쳤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래 글은 그날 한민호 선생님이 읽어 준 편지 원문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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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번의 환송연

선생님!

함께 웃고 고민하며 달려온 시간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가장 밝은 에너지였습니다. 단순히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 학교를 사랑하는 그 진심 어린 사명감이 곁에 있는 저에게도 늘 큰 자극과 감동이 되었습니다. 특히 학교를 알리기 위해 지역사회와 언론을 발로 뛰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선생님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전달된 우리 학교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선생님의 열정이 담긴 소중한 기록들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우리 학교가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환송연!

돌아보면 장교주 선생님 환송연을 전에 한 적이 있었습니다. 2019년 겨울, 송호고 파견 나갈 때 후배 교사들이 모여 석별의 정을 담아 공로패를 만들었습니다. 패에 새긴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경안고에 재직하시면서 20년 동안 학교 홍보를 위해 열심을 다해 노력하셨으며 배움나누미, 행복나누미, 경안의 정수 발간 등 학교 발전과 학생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기에 후배 교사들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아마 여기 계신 많은 분들께서도 공감하실 내용일 겁니다. 선생님은 학교홍보라는 고독한 싸움을 꽤 오랫동안 했으며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과 언론에 경안고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불철주야 애쓰는 모습은 세일즈맨이었습니다. 비평준화 시기 학교 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했지만, 선생님만의 역할은 분명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가정보다 우선이었으며 선생님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여정을 묵묵히 함께 했을 사모님도 학교 발전에 한 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선생님에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편으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압박감이 컸을텐데 어떻게 견뎌냈을지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

이렇게 열심인 이유가 무엇일까? 무척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즐기면서 오랜 시간을 학교 홍보에 열심인 이유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웃어 넘기거나 또는 당황을 하면서 얼버무릴 줄 알았는데, 배우가 준비한 대사를 줄줄 읊어대듯이, “안산의 최고 명문고를 만드는 것입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대한민국이 일본을 앞지를 수 있도록 우리 학생들을 좋은 인재로 교육하는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꿈은 막연했고 그때는 쉽지 않은 얘기라고 여겨졌습니다. 그건 한국 근현대사 속의 먼 이야기처럼 들렸고 그러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선생님은 2025년 2학기 마지막 수업을 공개수업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그 교실에는 선생님의 오래된 제자들도 참석하였답니다. 그 수업에서 선생님이 언급한 말도 대신 전해 드릴까 합니다.

'저는 경안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인재를 기르고자 노력하였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이지만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을 넘어 전 세계의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성장하였으니 교육자로서의 꿈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후회 없이 교직을 마무리해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꿈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진부한 이야기가 우리 모두가 아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장교주 선생님은 개발도상국 세대에 태어났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국가로서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거창한 얘기가 되어 버렸습니다만 학교홍보를 전담하던 그 시절,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를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진심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닿은 것일까요? 적어도 우리는 명문 경안고, 선진 대한민국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던 때가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옆에서 본 장교주 선생님의 진심은 그랬던 거 같습니다.


두 번째 환송연!

2019년은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컸다면 2026년은 기쁜 마음으로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표한 바를 이뤘다는 건 그 자체로서 멋지고 대단한 일입니다. 오늘은 이 마음으로 보내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엔 꺼내지 못한 섭섭함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시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조은-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지난 시간을 찬찬히 되돌아 봅니다. 또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선생님과 지내는 동안 더 많이 웃고 진심을 나누고 즐겁게 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지 못한 마음들은 애틋함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이제 이곳에서의 무거운 짐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선생님이 뿌린 밝은 에너지보다 더 큰 행복과 평안이 선생님 앞날에 가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늘 그랬듯이 어디서든 선생님만의 진심은 반드시 통할 것입니다. 먼 훗날 추억이 될 오늘, 선생님에서 작가로의 새로운 출발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의 멋진 동료여서 고마웠습니다.

동료 교사 한민호 드림.


710uyB2i6dL.jpg 당신이 만들어낸 변화와 당신이 감동시킨 사람들의 삶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이제 인생의 다음 장을 즐기세요.

이 글을 들으며 지난 3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미소를 타고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를 알아주는 동료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위로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민호 선생님은 평소 쉽게 곁을 내주는 사람이 아니다. 칼같은 성격으로 업무처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누구보다 깔끔하고 완벽하게 완수해 내는 그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는 매우 절제된 사람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꼼꼼하게 생각하고 공을 들였을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마움의 미소가 지어진다.

‘왜 그렇게 열심히냐?’는 질문을 받았던 건 어렴풋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이 일본을 앞지를 수 있도록…’이라고 대답한 것은 거창한 애국심이라기보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지나온 세대의 어떤 책임감이었다. 제자들에게만큼은 우리 세대처럼 대한 국민이라는 이름만으로 주눅 들지 않고, 더 큰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던 마음, 아마 그것이 나를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번의 환송연을 받으며 깨닫는다. 결국 나를 살게 한 건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한민호 선생님, 그리고 함께했던 모든 동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이 글과 더불어 퇴임식 때 받은 많은 이들의 응원 메시지는 내가 평생 간직할 선물이다. 예쁘게 포장해 내 마음 깊은 곳에 고이 두었다가 문득 그리운 날이 오면 조심스레 다시 열어보리라. 그날의 온기를 잊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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