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1997년 어느 날 2학년 남학생반 수업할 때 일이다. 평소 수업 시간에도 특히 반응이 좋았던 학급이었다. 수업 중 내가 설명과 함께 어떤 제스처를 취하면 그때마다 엄청난 반응으로 호응해 주었다. 선생님들은 이런 반 수업할 때가 가장 즐겁다. 그날도 평소처럼 교과서, 출석부, 커피를 손에 들고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조용히 기다리던 학생들 중 앞문에서 제일 가까이 앉아 있던 학생 2명이 갑자기 색종이 가루를 나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히 나머지 학생들이 두 손을 벌려 위로 치켜세우고는 “와~와~”하며 괴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잠시 동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색종이까지 찢어서 준비하고 환대해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나 또한 뭔가 아이들을 위해 퍼포먼스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두 팔을 벌리고 괴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말없이 서서 지켜보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날 믿느냐?”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더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응대해 주었다.
“네~ 믿습니다!”
그래서 난 또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와~~”
마치 교주와 신도들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손을 아주 약간씩 흔들며 아주 천천히 분단과 분단 사이를 걸어 다니며 가장 열성적으로 소리 지르는 아이에게 다가가 일일이 손을 잡아주고,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시늉을 하는 등 호응해 주었다. 어떤 녀석은 자신의 머리에도 손을 올려달라고 했고, 또 어떤 녀석은 이 상황을 열심히 그림으로 남기고 있었다. 한동안의 소란을 끝내고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수업에 참여해 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정말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보통 교주라고 하면 사이비 종교 집단을 이끄는 사기꾼 같은 이미지가 있다. 별로 좋은 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난 다르다. 내 사리사욕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교주. 재미있는 수업을 위해 퍼포먼스와 개그를 마다하지 않는 교주.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성적도 오르고 자신이 바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교주. 이런 것이라면 교주라 불리는 게 무슨 대수랴. 땅개(키가 땅에 닿을 정도로 작아서), 미친개(성질이 지랄 같아서), 독사(성질이 독하고 정이 없어서), 똥파리(성질이 더러워서), 차라리 때려라(잔소리를 너무 길게 해서), 배둘레햄(배가 너무 많이 나와서), 모여라꿈동산(머리가 너무 커서). 뭐 이런 별명보다는 낫지 않은가.
2학년 남학생반이 시초가 되어 수업에 들어가는 다른 반 아이들도 종종 이런 환대(?)를 해 주었고 난 똑같이 퍼포먼스로 응대해 주었다. 이미 다른 반에서 다 듣고 준비했는데 자기들 반에서만 내가 응대를 안 해주면 그 반 학생들은 삐치거나 상처받는다. 점점 소문이 퍼져 그 후로 몇 년간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장교주’라 불렸다.
2000년 2학년 12반 여학생반 담임을 할 때였다. 그때는 밤 11시까지 강제 야간 자율학습을 실시했다. 힘들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뭔가 깜짝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던 나는 빵과 음료수 등을 잔뜩 사서 우리 반 빈 교실 중앙에 쌓아 놓고, 칠판에 몇 개의 문장을 써 놓고는 불을 끄고 나왔다. 그리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5층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난 야자 감독 선생님께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 화가 난 듯 크게 소리쳤다.
“야! 2학년 12반 자식들아! 지금 즉시 밖으로 한 놈도 열외 없이 다 튀어나왓!”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은 놀라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빨리 안 튀어나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 지르자 그때서야 우리 반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하나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왜?’, ‘무슨 일이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정신상태가 안 돼먹었어. 오늘 종례 시간에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도대체 왜 자꾸 지적당할 일을 하나? 응?”
“죄송합니다.ㅠㅠ 잘못했습니다.ㅠㅠ”
무엇이 죄송하고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한 죄밖에 없다. 사실 그날 종례 시간에는 전달사항 외에 특별히 강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나의 현란한 연기(?)로 인해 자신들이 뭔가 잘못해서 담임이 열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머리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말했다. 숨죽이며 담임의 눈치를 보고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속으로 참 순진하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모두 우리 반 교실로 가서 야자 끝날 때까지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빨리 교실로 갓!!”
하나둘씩 짝을 지어 3층 맨 끝에 있는 12반 교실로 내려갔다. 나는 아이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맨 뒤에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교실의 불이 켜졌고 엄청나게 쌓여 있는 빵과 음료수, 그리고 칠판의 글씨를 발견한 아이들의 환호 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난 교실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감동하며 맛있게 빵과 음료수를 먹는 모습을 혼자 상상하며 흐뭇한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두리안의 ‘I’m Still Loving You’를 빵빵하게 틀고 교문을 빠져 나갔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칠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오늘은 빵과 음료수 맛있게 먹고 교실에서 쉬다가 집에 가거라. 더할 때도 있으면 뺄 때도 있어야 하거늘. 뒷정리하는 거 잊지 말고...”
“여기 놓인 빵은 나의 살이요, 음료수는 나의 피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꿈을 이룰 자 없느니라!
- From 장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