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찬 May 31. 2021

서슬이 퍼런 꿈. 부유하는 나.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5월]


5월17일. 서슬이 퍼런 꿈. 부유하는 나.

꿈을 찾겠다고 했는데 도리어 매일 꿀 수 있는 꿈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방향을 정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방향’이란 것의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어젯밤에는 왼손 검지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유리 조각이 날카롭게 박히는 꿈을 꾸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꿈이란 건 여전히 기이하다 -라는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지난 날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운명은 그저 돌이킬 수 없이 주어진 게 아니라, 그 역시도 그것을 받아들일 나의 태도에 달려 있을 거라는. 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채, 제 존재만 알린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내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서, 나는 나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시작점과 끝점 없이 흘기듯 선을 긋는 듯한 고민만 반복되는데.



이유에 대한 집착

나의 5월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이유’라고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내내 회의적인 시선을 지니고 마음껏 방황하더니 많은 것의 이유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궁금했고, 내가 하는 일이 궁금했고, 왜 사는지 궁금했고, 왜 아무런 의욕이 없는지 궁금했다. 나열하고 파고들수록 답이 나오기는커녕 꽤나 답답해지는 질문들을 달고 지냈다. 


고민한다고 당장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고, 그래서 깊이 생각할수록 분명 좋지 않은 감정으로 흘러갈 것이 뻔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되뇌어야 했다. 늘 하던 것조차 잡히지 않는 이상한 무기력감에서 비롯된 조급함이었다.


글을 쓰고 미술사를 공부한다. 이 둘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한다. 주로 내가 좋아한다고 정의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일상이었다. 나를 그렇게 소개했고, 어쩌면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매번 즐거움과 함께 감흥을 느끼며 할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필연적인 부담이 놓여있지만 그 후에 다가올 성취와 기쁨을 기억하기에 매번 다시 내달릴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나는 그 꾸준함을 기억하며 느리고 삐꺽거리더라도 걷고 또 걸어보았다. 


잘 알고 있었고, 잘 알고 있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잘 알고 있는데도 잘 서 있지 못한 5월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앉았다 일어나고, 누웠다 일어나고, 이마 한 번 세게 박아도 이 악물고 일어나고, 삐딱하게 서 있다 다리가 저려 울상을 짓기도 했다. 걷지 못한다면 서 있자. 일단은. 내가 바라보던 풍경의 시야는 놓치지 말자며. 내가 살아야 하는 일상의 최소한을 정의하는 마지노 선을 그렇게 그었다. 그저 우울증에 홀라당 빠져버리기엔 나는 그만큼 성장해 있었고, 힘을 낼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내가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걸 찾아볼 수 있었다. 그때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돌아보니 그렇다.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두 가지 말을 주워들었다. 하나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우연히 들은 것인데, “사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였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태어났으니 사는 거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하나는 야생 동물에 관련된 영상을 보던 누군가의 말이었다. “저들은 정말 그저 살기 위해 살아간다고” 처절한 사냥 현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는 일 그 자체가 사실 참으로 벅찬 일이 아닌가. 인간이야말로 이유라는 것을 적당히를 모른 채 사치 부리듯이 달고 다는 생명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잠시 지구에 불시착해 이곳을 살아가는 생물을 관찰하는 외계인이 된 마냥, 그런 생각을 중얼거렸다.


이런 상념들, 이런 고민들이 켜켜이 쌓인 5월이었다. 아, 그럼 이유에 대한 답을 찾았냐고 묻는다면 사실 입에서 떨어질 수 있는 단어 하나가 없다. 어차피 그런 질문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움직이고 나서야 비로소 실마리를 드러낼 질문이었다. 지금 바로 답을 줄줄 읊는 것이 되려 조금 걱정스러운 일이지는 않을지, 지난 시간을 살았던 나라면 화를 버럭 내버릴 문장을 이곳에 아무렇지 않게 써 본다. 그때의 내가 많이 힘들어하고 고민했던 걸 안다. 하지만 잠시 놓아버리면 될 일이 아닐까, 그저 움직여 보면 될 일이 아닐까, 하며 허세라도 부려 보니 마음이 편하더라. 그런 나른함이 내게는 아주 조금이라도 없었던 것일지도.



그렇게, 그리고 그래야 움직이는 사람

여러 고민을 했고, 여러 이야기를 찾으려 노력했고,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고선 내게 이제부턴 결론이 아닌 과정을 살피자고 했다. 내가 사는 더 많은 시간은 결론이 아닌 과정에 있으니까. 사실 좀 부끄럽지만, 이는 몇 년 전부터 매번 해오던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꽤나 결론이란 것에, 그러니까 선의 가장자리에 아주 얄팍하게 있을 시작점과 끝점에 여전히 지나치게 집착해왔다. 그래서 낯 뜨거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다시 말한다. 더 많은 내가 놓인 시간을 살아가자고.


도달한 지점의 찰나가 아닌 지금 내게 순환하는 감각을 바라보기로 했다. 애써 내는 힘이 아니라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기운 혹은 에너지 그 무엇인가의 흐름을 손가락에 걸쳐보기로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아닌, 확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며 일어나는 사유의 흐름을 품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를 미묘하게 바꾼다면 어떨까 싶었고,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다시 내가 긋는 ‘선’을 생각한다. 꿈과 함께 원망했던 시작점과 끝점이 없는 선을 그었던 나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한다. 완성될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못할 바에는, 완성된 그림을 버려두고 일단 선을 그어보면 어떨까 -라며 언젠가 한 것 같은 이런 생각을 또다시 한다. 어쩌면 인정해야 할지도. 나는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이고 그렇게 마음을 놓아야 능력이 작동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아직은 그런 사람인 것일 수도 있고, 아직도 그런 사람인 것일 수도 있다만. 무엇이 답인지는 한참이 지난 후에 나올 테니, 지금 무어라 답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내가 나의 것으로 다시 움직이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조금 덜 삐꺽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인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