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4월]
1. 예찬아 너를 대표하는 단어는 ‘비밀’이야.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꿈’은 디자이너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한 언저리 즈음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품었던 것이었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지원서를 쓸 때도 외국어와 관련된 직업으로 장래희망을 바꿔 쓸 법도 한데, 나는 당당하게도 디자이너를 써낼 정도로 확신에 가득 차 품었던 꿈이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고등학교에 입학 후 마주한 입시 현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 꿈을 버렸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정말 그 꿈을 버린 걸까, 실없는 질문이 함께 떠오른다. 정말 내가 버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딱히 직접 관여한 사람도 없으니 내가 버렸다고 하는 게 가장 편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어른들이 쉬지 않고 물어보는 “너의 꿈은 무엇이니?”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즈음, 어린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거나 뭔갈 만드는 걸 좋아하긴 했다. 칭찬을 받아야 한다면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 받고 싶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어린아이였던 나는 새로 산 가구와 벽지에 온갖 낙서를 하곤 했었다고 한다. 위대한 화가의 어린 시절 클리셰 같은 에피소드도 있는 셈이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셨을 때 도자 공예를 하고 계셨고, 우리 아빠는 당신의 삶에서 자신의 것을 표현할 기회가 없으셨지만 술에 취하시면 귀 아픈 볼륨으로 노래를 꺼내 틀으시곤 하는 감성이 풍부한 분이시다. 나는 나의 부모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그런 내가 걱정스러웠다. 아직 어린아이의 철없는 소리일 수도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이 보기엔 미래가 밝지 않은 화가를 외치는 나에게 엄마는 ‘디자이너’라는 직업 얘기를 꺼냈다. 사람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의 모습을 만드는 일이라는 간단한 설명에 이 철없는 초딩은 홀라당 반해버렸다. 디자이너, 그 이름마저도 너무 멋져 보였다. 내가 디자인한 것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거라니, 너무 멋진 일 같았다. 그렇게 초등학생의 나는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 디자이너를 꿈꾸기 시작했다.
얼핏 보아도 천진난만한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그대로 둘 수 없던 엄마는 그 과정을 몸소 경험하게 했다. 또래들보다는 키가 큰 아이였을지언정, 여전히 어린 티가 잔뜩 났을 12살 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길고 날카로운 연필을 깎아 쥐며 입시미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시 그 시절을 상기할수록 조금 기이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어찌 됐든 나는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미술학원을 잘도 다녔다. 나는 정말 디자이너가 되어야 했으니까. 빨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두세 시간씩 앉아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잔존하는 미미한 그림 실력은 사실 12살 때 그 기본을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터득한 그림 기술로 나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직접 그려보곤 했다. 늘 가지고 다니던 MP3를 가장 많이 그려보았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아는 물건들 중에서 당시에 가장 예쁘고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 MP3였기 때문이다(나와 같은 세대라면 알겠지만, 2000년대 만들어진 MP3는 참으로 귀엽고 아기자기했었다). 중학생 때는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우연히 자르고 붙이는 간단한 포토샵 기술을 배웠었는데, 그걸로 성이 안 찼는지, 아니면 뭔갈 만든다는 게 재미있었는지 혼자서 포토샵을 독학하기 시작했다(이때 키운 실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포토샵을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이런 이야기만 펼치니 참으로 찬란하지 않은가. 아마 딱 요 시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나의 10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 나 자신이 가장 빛나던 시기, 내가 이런 나여서 참 좋다고 생각했던 시기. 물론 좋은 인연이 함께했기에 보낼 수 있던 시간이기도 하다. 그립고 감사한 기억이고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이때에만 오롯이 남아있다. 사족이지만 그때가 조금 많이 그립다.
엄마는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주시기 시작했다. 그중 “디자이너는 자신을 대표하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라는 조언도 있었다. 아마 디자이너와 같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렇게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고민했다. 나를 대표하는 단어라, 나는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아마 내가 나에게 직접 던지는 첫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번 고민해 보아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창 사춘기 때여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오글거리고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 학생이 마주하는 현실이 그렇듯,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처럼 그냥 잘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를 찾고 표현해보려는 인생의 첫 노력은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는 툭하면 그 단어에 대해 내게 묻곤 했는데, 나는 “글쎄...”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딸 속마음을 모를 리가 있나,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리셨던 것 같다. 그러다 내게 건넨 말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예찬아, 너를 대표하는 단어로 ‘비밀’ 어때?”
그 단어를 듣고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순간 멍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찰나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왜지?”라는 질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숨기는 게 많았나, 내가 다른 사람들 시선에는 감추는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이나, 같은 부정적인 질문부터 떠올라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원체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내성적인 사람이긴 했지만, 계속 말했듯 그때의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때의 ‘나’라는 사람, 내가 가진 꿈, 내가 살고 있는 일상, 내가 분명하게 해내고 있는 일과 엄마가 불현듯 내게 건넨 ‘비밀’이란 단어. 순간 이 모든 걸 어떻게 연결해서 바라봐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인식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모습이 어긋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상해’라는 기분만 맴돌았다.
더 이상하게 느껴졌던 건 다른 이도 아니고 엄마가 내게 그 단어를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나, 근데 왜 이런 단어를 내게 말한 거지' 라며 질문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수긍하기가 싫어졌고, 단어를 오래 담아두지 않고 바로 스쳐 보냈다. 그런 방식으로 중학생 시절이 지나가고,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가고, 어쩌다 보니 대학에 오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10년도 더 된 기억이 다시 내 주변에 소환되기 시작했다. 어째 살면 살수록 그 단어만큼 내게 꼭 맞는 것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자유롭게 나를 펼치기가 망설여져서 나를 향한 의심과 불안에 안으로 말려버리다 구멍이 막혀버린 도넛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나를 비밀의 상태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비밀’이란 단어가 연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상태들이 내게 가장 익숙한 삶의 형태, 태도,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나를 포장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고, 가면을 써야 한다면 무의식적으로 집어 들던 것이었다.
다시 돌아보면 그렇게 빛났던 시기라며 회상했던 그때에도 이런 내면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원래 기억이라는 것이 더 선명하고 좋은 것만 남기 마련이니까. 그저 사람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이고 낯을 가리던 나의 모습 같은 것은 '지금'이라는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지 못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사실 그런 나의 답답한 면을 좋게 보지 못해서, 그리고 너무도 싫어서 애써 감추고 잊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나도 내게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을 그때의 엄마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던 걸까. 이미 저 멀리 밀려난 기억이기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이 글조차도 별로 확실하지 못한 두루뭉술한 글일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나를 대표하는 단어는 비밀이다”라며 이제야 이 문장을 한번 읊어본다. 별로 어색하지 않다. 이 단어를 담담하게 입에 담고 이곳에 쓰는 순간이 이제야 펼쳐진다.
그럼 앞으로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게 되려나. 뜬금없이 나의 삶의 태도를 반추하는 또 다른 분기점에 다다른 것 같다. 이 글의 첫 문장을 쓸 때만 해도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이렇든 저렇든 지금 드는 생각은, 앞으로도 꽤 오래 나 자신은 나에게도 ‘비밀’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상념이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예찬아, 너를 대표하는 단어는 정말 ‘비밀’이니.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니면 슬픈 걸까. 조금 뒤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래. 너는 어떤 작품을 끄적였을 때도, 매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내면을 풀어헤치곤 했는데 끝내 버거워하곤 했잖아.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너는 그걸 모순이라 표현하곤 했는데, 다르게 말하면 사실은 네가 네게 스스로 말려들며 서로가 서로를 감추고 마는 비밀의 상태에 남아버린 것을 의미하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늘 껍데기를 벗긴다고 하면서도 결국 나오는 건 헤아릴 수 없는 맥락이 우글거리는 기묘하고 불편한 장면이었고, 그렇게 눅눅한 구석에서 평안하려는 장면이었으니까. 여전히 너를 대표하는 단어는 ‘비밀’이었을까, 아니면 '그래 비밀이었구나' 하며 이제는 다른 변화를 기대해 보아야 하는 걸까. 그런 기대를 할 수는 있는 걸까.”
2. 조금 덜 삐꺽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인데.
'다른 사람 앞에서의 나’에 대한 고민이 늘었던 한 달이었다. 작은 만남만 가져도 내가 상대에게 불편한 시간을 주지는 않았는지, 나는 어떤 태도로 그를 마주했었는지 불안과 함께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 반복의 어느 끝자락에는 매번 ‘그때 대체 왜 그랬냐며’ 부끄러움과 함께 밀려오는 감정에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내면만 두둥실 떠오르곤 했다. 무어라 명확한 판단도 잘 내리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계속 삐꺽거리는 상태에 머무는 건 더 싫어서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결국 두둥실 떠오르는 리듬의 궤도에 종종 나를 걸어두었다.
어떤 일에서든 조금만 덜 삐꺽거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항상. 온갖 것들을 이루겠다며 잡다가도 다시 흩어지게 두는 와중에 이것만은 평생 놓쳐본 적 없는 그 무엇인가였다.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덜 삐꺽거리기” 너무도 상대적인 정의니까. 줄곧 덜 삐꺽거려왔어도, 나는 여전히 그것보다는 덜 삐꺽거리기를 꿈꾸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냥 ‘무엇인가’라고 말하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삶이 움직이는 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도, 일상도, 삶도 결국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삐꺽거린다는 표현은 조금 억센 음을 연상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꽤나 지루하고 담담하게 반복될 뿐이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즉흥곡 속에서 자신이 고요히 머물 수 있는 음을 어느 한구석에서 잘도 찾아낸 것처럼. 그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어떤 음 위에 놓여있는지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이 연주하는 곡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그것을 알 수는 있을까. 참으로 기이한 연주곡이다. 이를 연주하는 기묘한 연주자는 자신이 뭔 음을 연주하고 있나 그 콩나물 머리 끄트머리라도 알고 싶어 이런 실없는 소리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조금 덜 삐꺽거리며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게 참 어렵단 말이죠.
3. 휘적휘적
일상이 조금 흐트러진 사이, 나는 그 사이를 종종 산책으로 메꾸곤 했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홍제천을 찾아가 천을 따라 놓인 널찍한 산책로를 이어폰을 꽂고 한적하게 걷곤 했다. 날씨가 좋다 하면 이른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다 홍제천 근처에 내려 몇 분 동안 산책하다 집까지 걸어갔다.
평범한 하천이지만 바라볼수록 꽤 기묘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랫동안 공사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도시 한가운데에 놓여 천의 양쪽과 그 위에도 큰 차도를 끼워놓고도 강가라 하면 모여들 수 있는 자연의 장면이 옹기종기 잘도 담겨 있는 모습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좋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새끼 오리 떼를 보았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강물 바닥의 흙과 오묘하게 닮은 갈빛을 띤 작은 솜뭉치들이 거친 바위를 오르내리고 수면에서 참방거리는 것이 꽤 귀여웠다. 빠르게 움직이던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명백한 연유가 있기도 했고, 동시에 잠시 일상에서 회피하고팠던 마음도 있는, 이런저런 여러 이유들과 함께 유독 여백을 많이 두었던 한 달이었다. 할 일만 꼬박꼬박 하며 살아보았다. 남은 여유는 대책 없이 자유롭게 써보면서. 그래서 분명 시험 기간이었고, 자주 겹치곤 하던 할 일들에 계속 쫓기면서도 한편으론 아주 여유로운 시간도 함께 끼고 있는 일상을 살았다. 전혀 다른 밀도의 시간이 하루라는 단위 속에 한꺼번에 맞물려 있었고, 나는 그 급격한 삼투 작용 사이에서 급하고도 어영부영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살아보며 얻은 결론은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정말 할 일만 잘 지나갔을 뿐, 딱히 남는 것이 없었다. 공허함이 느껴졌고 이번 달 말 즈음부터 나를 유지할 일상을 되찾기 위해 놓쳤던 것을 다시 본래의 속도와 궤도에 올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도 다시 붙잡고, 저것도 다시 시작하고, 안 하면 그만이 아닐까 생각하던 사소한 것들이 나를 유지하는 일상을 지탱하는 데 이토록 중요한 존재였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손에 쥐었던 걸 놓아봤으면 놓아봤지, 새롭게 잡은 건 없는 듯한 4월 동안 유일하게 있었던 변화 혹은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산책’뿐이었다. 한동안 ‘산책’이 내가 진정 필요해서 선택한 휴식인지, 그저 일상에서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인지 조금 혼란스러웠었는데 분명 잘 선택한 휴식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덕분에 잠시 벚꽃도 보고, 내게는 분명 시간이 있다는 걸 감각하고, 내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만끽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체력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몸소 실감한 것은 덤이었다.
요즘은 걷다 보면 전보다 땀이 많이 배어 나온다. 여름이 다가온다는 시간의 흐름을 그렇게 온몸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냥 휘적휘적 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4월의 유일한 새로움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