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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Apr 17. 2023

1. 우물 위에 자란 나무

그들은 외면의 꿈을 꾼다. 나무 이파리엔 우울의 향이 가득 베여있었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1-
우물 위에 자란 나무

illustration by sasa


미간에 입맞춤하는 내음이 가득하다. 아득한 물 비린내가 우물에 잔뜩 고여있다. 그런 모양의 우울을 뿌리로 끌어안고 자라난 나무. 우물에겐 나무가, 나무에겐 우물이 반갑지가 않았다. 그들은 외면의 꿈을 꾼다. 나무 이파리엔 우울의 향이 가득 베여있었다.


여린 씨앗이었다가 순식간에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만 나무는 크게 놀랐을 것이다. 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시선을 내리니 땅이 이미 저보다 이만큼이나 훌쩍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충격으로 나무의 첫 성장은 땅을 향해 고꾸라졌다. 아늑한 대지의 품으로. 우물의 가장자리에서 저 땅을 향해, 데크레센도를 긋던 나무는 시선을 굴리다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맞다. 나무는 위를 향해 자라야 했지. 아마도, 그랬어.“ 나무는 뒤늦게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우려고 애를 썼다. 안타깝게도 이미 휘어진 모습 그대로 단단해져버린 나무 기둥이었다. 남은 수액을 쥐어짜서 애매하게 세운 허리. 나무는 무성한 잎 무더기를 머리에 매단 채 온전히 서 있지도, 온전히 누워있지도 못한 ‘불안’이 되고 말았다.


우울을 헤매다 우물 위에 자란 나무를 목격한 이따금의 존재들은 나무를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다. 아린 마음에 시큼한 숨을 토해내고 비틀비틀 도망쳤다. 아무도 불안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불안이 ‘나쁘다고’ 헐뜯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공존이었다. 우물 위에 자란 나무에겐 이끼가 꾸준히 자라났다.


나무의 녹음은 지나치게 푸르고 무성해서 - 빛이 나는 듯도 했다 - 숲의 너른 반경에는 이미 불안의 잔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마 그곳을 지나친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illustration by sasa
illustration by sasa


“나는 분명 아무것도 뵈지 않을 땅속의 씨앗. 아니, 그 뭣도 아닌 초라한 흙 알갱이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숨죽여 살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뿌리 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물 비린내를 맡으며 나무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은 소망을 되뇌기 시작했다. 죽은 소망. “나.는. 높.이. 자.라.고. 싶.지. 않.은. 나.무.였.다.” 밤이 되면 아주 가끔 눈을 치켜뜨며 별을 스쳐봤다. 차라리 물구나무가 되었어야 했는데. 뿌리에 질끈 힘을 주면 우물은 단단한 침묵으로 대답했다. 이유도 의미도 없는 울음이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없다. 어째서. 우물 위의 나무는 읊을 것이 우울밖에 없었다.


적막이 불면증을 낳는 곳. 이곳의 낮은 밤보다 깊었다. 나무를 둘러싼 숲은 그림자를 닮아 울창했다. 그런 어둑한 세상에도 많은 생명의 비밀들이 자신의 생기를 속살거리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나무는 모두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외면의 몽상은 그대로 눈앞의 현실이 된다. 나무는 가지 구석구석에서 곪아 터져 굳어가는 제 수액만 생각했다. 청록색의 수액 덩어리는 보석으로 굳어갔다.


“나는 점점 내 안으로 들어간다. 내 안은 깊은 수렁이다. 제일 긴 뿌리의 끝보다 더 깊고 아득한 수렁이다." 악몽은 마치 소원을 이뤄주는 대가로 빼앗은 밤의 어둠을 손에 움켜쥐고 속삭이는 주술사의 주문 같았다. 나무에겐 백야만 남았다. 이곳의 낮은 밤보다 깊었다.


우물의 까만 속내를 까만 빛으로 착각한 담쟁이덩굴이 우물 안의 벽면을 축축하게 감싸 안았다. 시린 물방울을 어루만져주는 건 침묵의 이끼들이다. 스산한 물소리가 울리는 우물은 수렁이고 악몽이었다. 나무는 우물이었다. 침잠할수록 그곳은 적막이 된다. 오직 암흑뿐. 암흑 속에서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 못하는 눈꺼풀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파르르. 파르르. 울음소리. 눈을 뜬 채로 수마에 빠져든 착각의 눈꺼풀은 결국 닫히지 못한다. 또옥똑. 눈물이 내는 비명 소리가 지나친 이곳에서 나무는 한없이 깊은 낮을 헤맸다. “나는 여기에. 나는 여기에” - 나무가 우물에 내뱉는 것들은 그런 형태였다.


하나가 홀로 남겨지면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우물 위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나야 하는 낮은 홀로 남는 밤보다 무용했다. 무용할 만큼 선명해지는 고립, 선명한 태양은 악몽이 된다. 모든 게 꿈같았다. 나무는 꿈이기를 바랐다.


나무는 아무도 없는 순간에도 시선을 느끼곤 했다. 나무가 우물 저 깊이 쌓아두던 우울의 무덤에서 기어 나온 유령들의 시선이었다. 기어코 다시 나무 앞에 나타나 우울을 되뇌는 짓궂은 아이들. 우울을 버려내면 무덤에서 다른 우울이 기어 나와 나에게 인사한다. 안녕, 안녕! 나무는 충분히 버거웠고, 백야는 지나치게 적막이었다.


illustration by 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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