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운 장소다.
제일 무서운 장면이, 머리에 뿔 달린 악마가 벌거벗은 나에게 다가와 삼지창으로 가슴을 콕 찌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대한 통에 던지는데 의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에서 내 살이 익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나는 역시 벌거벗긴 채 기둥에 묶여 있다.
역시 머리에 뿔 달린 악마가 다가오더니 긴 칼로 내 옆구리 살점을 도려낸다.
고통스러운 비명은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허벅지, 가슴, 팔뚝, 얼굴까지 회를 뜬다.
붉은 피가 바닥을 철벅하게 적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새살이 돋아난다.
다시 뿔 달린 악마가 긴 칼을 들고 다가온다.
또또 다른 장면도 있다.
나는 벌거벗은 채 들판에 서 있다.
주위에 낯선 얼굴이 많다. 나와 같은 죄인이다.
저 끝에서 거대한 원통이 굴러온다.
죄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친다. 피할 길이 없다.
가슴이 터질 정도로 뛰다가 결국 기둥에 깔린다.
발목부터 납작하게 작살나면서 허벅지 허리 등 머리까지 짓누르고 지나간다.
뼈가 깨지고 살이 터졌는데 잠시 후 멀쩡한 몸으로 일어난다.
상처가 하나도 없다.
들판 끝으로 간 원통이 멈추더니 다시 돌아온다.
나와 죄인들은 반대편으로 전력을 다해서 뛴다.
도대체 이 상상력을 누가 줬을까?
다들 지옥에 대해 이런 비슷한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 같다.
지옥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불교의 지옥인 ‘나락’(奈落)은 윤회의 한 과정이다. 경전에 따라 무간지옥, 등활지옥, 흑암지옥, 한빙지옥 등 수많은 지옥이 존재한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업이 소멸되면 다시 환생할 수 있다.
유대교의 지옥은 ‘게힌놈(Gehinnom)’이다. 예루살렘의 쓰레기 소각장인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했다. 죄 많은 영혼이 정화되는 장소이다. 대부분의 영혼은 최대 12개월 머무른 뒤 정화되지만 완전히 악한 자만이 영원히 머무른다.
힌두교의 지옥은 ‘파탈로 카(Pātāla)’이다. 야마(Yama) 신이 죽은 자를 심판해서 업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낸다. 죄의 업이 사라지면 다시 환생할 수 있는 ‘정화의 과정’으로 지옥이다.
천주교의 지옥은 기독교와 비슷한 개념을 갖는다. 천국, 연옥(구원받았지만 정화되지 못한 영혼이 머무는 곳), 지옥으로 나뉜다. 구원이나 탈출은 할 수 없다.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슬람교의 지옥은 ‘자한남(Jahannam)’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의 심판 후 불의 형벌을 받는 곳이다. 일부 해석에서는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도 보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을 부정하고 악행을 지속한 자의 영원한 형벌로 여기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지옥’의 개념이 고통스러운 형벌의 장소가 아닌 죽음 이후의 어둠의 세계(스올)로 묘사된다.
주요 구절을 보면 아래와 같다.
(시편 9편 17절)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 ‘스올’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떨어진 죽음의 장소로 표현된다.
(잠언 15장 24절) ‘지혜로운 자의 생명길은 위로 향하나니 그로 스올을 떠나게 하느니라.’
- 지혜와 의는 스올(지옥)의 운명에서 벗어난다.
(이사야 14장 9절~11절)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였으며…… 네 영광이 스올에 떨어졌도다.’
- 교만한 자가 죽음 뒤에 맞이하는 굴욕의 상태로 그려진다.
이런 구절을 볼 때 구약의 ‘지옥’에 대한 개념은 형벌보다는 ‘죽음 이후의 음침한 세계’에 가깝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헨나(Gehenna)’ 현대 지옥 개념의 시작이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의 골짜기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쓰레기와 시체가 불태우던 곳이다.
그래서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님은 게헨나에 대해 약 11회 이상 언급하셨지만, 그것은 공포를 유도하기 의도한 게 아닌 ‘하나님과 관계를 끊은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지옥은 하나님이 불신자를 영원히 버리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할 때 나타나는 관계를 의미한다.
단지 겁주기 위해 만든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의 세상’이 바로 불못과 같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도대체 맨 위에, 붉은색으로 악마가 나타나는 저 살벌한 지옥의 개념은 누가 만들었는가?
‘지옥’을 현실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기가 바로 중세다.
교회가 커지고 정치권력을 가지면서 통제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여기에 신앙적인 순종을 요구하면서 헌금 강요, 면죄부의 판매가 지옥의 공포를 부각했다.
이단을 추출하기 위한 마녀 사냥도 한몫했고.
이제부터 지옥은 불타는 구덩이, 영원한 고통, 악마의 고문으로 이미지가 고착화된다.
더불어 14세기에 발표한 단테의 <신곡>은 9층 구조의 지옥을 묘사한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구원과 심판을 나누고 있다.
이런 현상을 접하면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수천년 전부터 인류의 뇌리에 각인된 지옥은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전도하는 기독교인도 만나는데 이렇게 쉽게 정의를 내리는 것도 무모하다.
지옥으로 가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이 있을까?
임진왜란에서 왜구를 무찌르던 이순신 장군님도 있을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 분들은 억울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사람들은 선행의 측정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 기준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믿음이라는 거 자체도 무척 관념적이다.
예를 들어,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무판자를 붙잡고 표류되었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 자리에서 ‘믿습니다!’하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해주는 걸까?
단지 절박하기에?
이제껏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한 행동은 전혀 상관없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기독교인이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신앙을 규정하는 것 같다.
무척 허황스럽다.
지옥도 이렇게 허황스러운 개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