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인쇄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활자를 갖고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한쪽 벽을 빽빽하게 채운 수십만 개의 활자에 방문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린다. 그곳이 당신의 직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되었다.
인류 최초로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직지’다.
둘 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다. 이에 자부심을 품어도 된다.
우리나라 출판 문화의 뛰어난 힘도, ‘파주출판도시’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도시를 세운 배경도, 우리나라 주요 도시마다 인쇄 골목이 이어지는 풍경도 이런 역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활자는 고려 시대부터 책을 인쇄하는 도구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만지게 하고 자기 이름도 찾아 넣으면서 직접 책 표지를 만든다.
자기 이름이 들어간 표지로 오침제본 책을 만든다. 아이들은 직접 바늘을 쥐고 다섯 개의 구멍을 실로 엮으면서 제본한다.
사극에서 소품으로 나오는 그런 책이다.
아이에게 억지로 책을 읽도록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이가 책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게 활판인쇄박물관의 의도이기도 하다.
당신은 큐레이터로 이런 체험을 진행한다.
때문에 주말마다 박물관을 찾는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같이 따라온 자식을 만난다. 대부분 아이가 스스로 완성한 책을 대견하게 여기며 즐거워한다.
박물관을 나서며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부모님도 꽤 있다.
모든 가정이 단란하거나 행복하지는 않다. 왜곡된 애정으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도 꽤 있다.
체험 도중에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행동이 느리다고 야단치는 어머니가 있다.
아들의 태도가 건방지다고 그 자리에서 귀싸대기를 날리는 아버지도 있다.
딸이 오침제본으로 책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아버지도 있다.
초등학교 아들이 어른에게 욕을 뱉었는데도 오히려 안 했다고 바락바락 우기며 옹호해 주는 어머니도 있다.
프로그램 중에 옛날 인쇄기를 시연하는 순서가 있다.
100년 넘은 인쇄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귀를 막을 정도다.
낯선 인쇄기가 작동하는 광경은 관객에게 흥미를 충족시킨다. 더불어 이런 체험을 한 것을 굉장히 뿌듯하게 여긴다. 역시 만족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당신도 흐뭇하다.
“씨팔, 좃나 시끄럽네.”
인쇄기가 돌아가는 도중에 앞줄에 선 아이가 한 말이다. 당신은 귀를 의심한다. 다른 방문객도 같이 있는 공간이다. 잠깐 인쇄기를 멈춘다.
“고운 말 써야지.”
당신은 살짝 아이를 째려보고 다시 인쇄기를 가동한다.
“씨팔, 좃나 시끄럽네.”
똑같은 말이 들린다. 반항하는 거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신은 인쇄기를 멈춘다. 아이를 똑바로 노려본다.
“너 뭐라고 했니?”
아이는 대답이 없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그러면 되니?”
당신은 어른이다. 아이가 잘못했으면 지적해야 한다. 박물관에서는 더 그래야 한다. 아이는 순순히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안도의 물결이 밀려오는 그때, 같이 온 아이의 엄마가 항의한다.
“왜 우리 애한테 그래요? 사람들 앞에서 기죽게?”
“애가 욕을 했잖아요.”
“무슨 욕을요? 나는 못 들었는데. 너 이리 와 봐.”
엄마는 목을 꺾고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묻는다. 눈동자가 터질 것 같다.
“너 욕했어? 안 했지. 그지?”
“안 했어요.”
아까 사과까지 했으면서 엄마의 기세에 눌려 아이는 거짓말을 한다. 이때 엄마는 목이 터져라 외친다.
“우리 애가 안 했다고 그러잖아요!”
가관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엄마는 전화를 걸어 박물관 밖에서 딸과 놀고 있는 남편을 부른다. 계속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낸다. 급기야 휴대폰을 던져버린다.
자식의 치부를 감추려는 과한 동작이다. 달려온 남편은 우리 아들 절대로 욕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자기 아들이 욕한 거 그들도 알고 있다. 도대체 저렇게까지 자식의 자존감을 찾아주려는 이유를 당신은 이해할 수 없다.
더 이상 체험을 진행할 수 없다. 당신은 물러나고, 박물관의 다른 직원이 맡아서 진행한다.
체험을 마친 후 엄마와 아들이 손을 잡고 나란히 나간다.
그 자리에 있던 부모님들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한마디씩 한다.
“저도 그 아이가 욕하는 걸 들었지만 사건이 더 커질까 봐 가만히 있었어요.”
“왜 애를 저런 식으로 키우는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애가 커서 어떻게 되려고.”
“잊어버리세요. 오늘 진행 감사했어요. 저런 여자가 아니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게 부모로서 옳은 애정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가치관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정답을 내릴 수 없다. 애정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다.
전부 오답이다. 역시 오답의 기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자신이 막연하게 옳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느 부모도 훗날 자신이 준 애정의 결과를 진단할 수 없다.
과연 아버지에게 당신은 어떤 오답이었을까. 큰형과 관계에서는?
큰형과 주아는 어떤 오답이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