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성 태풍인 거죠?

WEEK4 [7/7-7/13]

by 시옹

7/7 월, 두통이 말하는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회사는 바쁜 사람들이 바쁜 대화를 하며 바쁜 하루가 흘러갔다. 입사 후 환대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이만큼 낙동강 오리알처럼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리라 생각은 못한 것 같다. 필리핀에서는 그래도 회사 직원분들이 집 계약이나 통신사 가입, 은행 계좌 개설 등을 안내해 주셨는데, 이곳 말레이시아에서는 내가 물어봐야 알려준다. 아무래도 좋으니 일만 할만하면 나 스스로도 정보를 찾으러 발품팔 수 있는데, 이건 뭐 적응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집 인테리어를 중개업자와 조율하는 과정도 굉장히 골치다. 말레이시아 차이니즈(이하 말차)인 중개업자의 성격이나 스타일도 잘 파악이 안 되고, 집주인과의 취향 차이도 있어서 일이 잘 진행되지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두통이 심했다. 아마 쿠알라룸푸르가 뿜어내는 도시의 소음과 답답한 빌딩들, 그보다 더 답답한 회사, 그리고 진전이 없는 집 계약과정이 모두 합쳐져서 드디어 뇌가 과부하가 걸렸나 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타이레놀도 잘 먹지를 않고, 결국 잠까지 설쳐버렸다.

입사 전 제주에서 얻어온 삶의 활력과 목표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7/8 화, 햄버거로 채우는 야근

점심에 선임분이 태국 음식을 사주셨다. Malai Thai Cuisine이라는 곳에서 먹었는데 가격대가 있는 만큼 식당이 깔끔하고 맛도 태국 본연의 맛이었다. 누구 대접하러 모셔오기에 좋은 곳 같다.


2시간 반 야근을 했다. 정신없는 회사생활과 온보딩을 신경 써주지 않는 각자도생 회사문화 때문에 쿠알라룸푸르 적응이 늦어지고 있다. 직장 때문에 나의 삶이 뒷전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

쿠알라룸푸르에도 파빌리온 몰(Pavilion Mall)이라는 쇼핑몰에 파이브 가이즈(Five Guys) 버거집이 있다. 야근을 하면서 동료분들과 함께 시켜 먹었는데, 번(Bun)은 별로였지만 푸짐하고 먹을만했다. 사실 말레이시아에 입국하기 전부터 쿠알라룸푸르에는 유명 프랜차이즈들이 얼마나 있나 궁금해서 검색해 봤었는데, 그때부터 파이브 가이즈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 외에 서브웨이, 쉑쉑 등도 있다. 필리핀 세부에는 서브웨이가 없어서 굉장히 아쉬웠는데 쿠알라룸푸르는 수도답게 지점이 꽤 많다.


7/9 수, 작전명: 현생사수(現生死守)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를 온전한 인생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 회사가 힘들더라도 에너지를 잘 조절해서 나의 생활도 꾸려나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외근으로 오래 서있어서 뻐근한 다리와 복잡한 머리를 끌고 호텔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를 좀 하고, 유튜브 영상편집을 끝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백수 생활의 내용을 담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 임시 숙소 호텔에서 제대로 된 집으로 이사를 가는데, 문제가 좀 생겼다. 집주인-중개업자-나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계약할 때 요청했던 가구들이 모두 준비되지 않은 채 들어가게 생겼다. 유독 한국인이 일을 잘하는 건지 아님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일을 대충 하는 건지, 말차 중개업자 M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선 청소기를 주문해 놨다길래 무선 청소기로 교환가능하냐고 질문했더니 환불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해놓고 며칠이 지났다. 환불의 경우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기만 하면 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빨리 문의해야 좋은 일 아닌가?

"I'm worried that I might be sleeping with no bedsheet on the move day"

"(이삿날 침구 없이 자야 될까 봐 염려됩니다)"

라고 완곡하게 몇 번 얘기를 하니, 오히려 중개업자가 급발진한다. 그것도 역시나 브로큰 잉글리시로.

"I'm not sure why I'm being pressure here"

"(왜 저를 압박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나도 화가 나고 답답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답변을 하지 않았더니, 몇 시간 뒤 본인도 미안했는지 오늘 밤에 직접 이케아에 가서 물건을 사 오겠다고 한다.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M을 달랬다.

"It's ok. We work to live, not live to work. We are not saving the world."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서 사나요.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그런데 웬일인가. M이 정말 오늘 밤 직접 이케아에 가서 사진을 보내왔다.


7/10 목, 회사 행사 DAY1

본격적으로 회사 행사가 시작됐다. 행사 자체는 대외비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계속 케이터링 뷔페를 식사로 먹었다. 그러다 보니 칼로리가 전혀 어림잡아지지 않는다. 내 몸이 자꾸만 낯설고 다양한 음식에 당황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번 주 일요일에 집으로 이사하고 이 과도기가 끝나면 깔끔하고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이대로 계속 먹다간 소스 칼로리만 밥 한 끼급일 것 같다.


토스가 해외 ATM 수수료 면제해택을 변경했다. 이제는 무제한 수수료 무료가 아니라, 일정 금액까지만 면제가 된다. 그걸 모르고 집 보증금 때문에 ATM에서 현금을 뽑다가 수수료 폭탄을 맞았다. (몇만 원대) 이런 순간에는 괜히 해외에 나와서 손해만 보는 것 같아 속상하다. 원래 해외에서 손해 보고 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이런 일이 하도 잦다 보니 이제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것 같다. 그래, 손해도 보지만 이득도 있으니까.


7/11 금, 회사 행사 DAY2

이제 조금씩 다리가 파업을 시작했다.

종아리엔 알이 배겨서 가만히 서있어도 덜덜 떨리고, 허벅지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쥐가 날 것 같다.

회사 때문에 이렇게 건강이 망가져본 건 꽤나 오랜만인 것 같다. 이렇게 되면 피곤해서 운동을 못하고, 운동을 못해서 건강이 악화되는 악순환이다. 회사 때문에 건강을 놓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있을까!

그래도 이번 주가 태풍 한가운데라고 믿고 싶다. 이례적인 행사이기도 했고, 앞으로는 10월에 큰 행사 외에는 이런 규모와 중요도의 행사가 없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의 버스정류장엔 버스시간표 따윈 없다. 하염없이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뿐. 구글맵에 대충 배차시간이 나오긴 하지만, 교통체증이 심한 이곳에서는 그 또한 의지할 수 없다. 그래서 차가 없는 외국인들은 택시(그랩)를 많이 타게 되는데, 이 또한 택시가 올 때까지 보통 10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건물 바깥에서 기다리면 더위와 소음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십상이다. 이런 불편함도 차차 적응하겠지만, 이런 혼돈의 카오스에 적응을 하게 되는 그날이 그리 기대되진 않는다. 그때가 되면 나도 쿠알라룸푸르의 소음 중 일부가 되어있을까?


7/12 토, 회복의 주말

드디어 잠이란 걸 잔 것 같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조식을 먹고, 호텔 한 달 살기 유튜브 영상 촬영을 했다.

저녁에는 미드 밸리 메가몰 GSC에서 영화 <쥬라기 공원: 새로운 시작>을 봤는데, 너무 구려서 충격이었다. CG는 돈과 시간을 쓰지 않은 것이 너무 티 났고, 연출과 스토리도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보면서 계속 한숨만 나왔던 영화. 그리고 영화관 에티켓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도중에 폰을 보거나, 떠드는 것은 기본이었다.

저녁으로는 Restoran Soong Kee & Lao You Ji Porridge에서 중국 비프 누들(Beef Mince Noodle)을 먹었다. 에그 누들이 꼬들꼬들하게 맛있었고, 다진 소고기 양념은 짜장소스와 비슷하지만 간이 연했다. 식사자리를 소란스럽고 시끄러웠지만 음식 자체는 맛있었던 곳.

술이 마시고 싶어서 Rimbar KL라는 바에 갔는데, 타이거 맥주가 18링깃(약 5800원)이었다. 양이 350ml짜리 작은 맥주기 때문에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


7/13 일, 이삿날

호텔 건너편 콘도로 이사를 가는 날. 오늘도 부지런히 수영을 하고 조식을 먹고 집을 싸서 택시를 타고 길을 건너 콘도에 도착했다.

말차 중개인 M은 오늘도 지각이다. 아직도 이 친구를 얼마나 믿어야 되는지 의문인데, 막상 집에 가보니 상당히 많은 물건들을 이미 사놓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소통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보통 일이 끝나면 "완료됐다"라고 알려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M과는 그게 안된다.

내가 첫 입주인 집에는 새집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타일가루와 먼지가 쌓여있다. 아무렴 어때, 벌레만 안 나오면 돼.

아방(아저씨의 말레이 버전)이 와서 거울 설치, 이케아 조립, 방충말 설치 등을 해주고 떠났고, 나는 저녁으로 버거를 시켜 먹었다. 다리가 더 이상은 걷지 말라며 말렸지만 애써 끌고 에비뉴 K 쇼핑몰다이소(일본 다이소)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왔다. 말레이시아 일본 다이소에는 가격이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데, 알고 보니 모든 물건이 5.90링깃이었다. (한화 약 2천 원)


가장 우려했던 일들이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좀 숨을 고르고 신변을 정리할 수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