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와라즈, 69호수
페루 와라즈(Huaraz)는 등산가들 사이에서 '남미의 스위스' 또는 '안데스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페루 중북부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3,052m의 고산지대 마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화강암 산맥인 코르디예라 블랑카(Cordillera Blanca)의 관문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고작 23살이었던 나는 등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미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기에, 빙하가 녹아 만들어졌다는 '69호수(Laguna 69)'의 에메랄드빛 호수를 보기 위해 그 등산이란 걸 해보고자 와라즈에 도착했다. 69호수는 무려 해발 4600m라는 어마무시한 고도를 자랑하기에, 장기여행자로서 필수적으로 사수해야 하는 건강을 위해 하루는 와라즈 시내를 돌아다니며 고산지대에 적응을 하기로 했다.
남미여행을 한 달간 하면서 늘 다인실 도미토리에서 자다가 딱 2번 싱글베드와 개인 화장실이 있는 숙소에 묵었는데, 와라즈 숙소가 그중 하나였다. 1박에 단돈 1.5만 원인 낡아빠진 숙소였다. 시내에서 도보 10분이었지만 경사진 곳이라 캐리어를 끙끙대며 가지고 올라가니 고산병이 절로 느껴졌다. 사실 고산병인 건지 이런 곳에 숙소를 예약한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이었는진 잘 모르겠다.
호스텔 주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뭘 불평도 사치. 개인 화장실, 샤워실, 그리고 혼자만의 방이 있는데 무엇을 더 원하리.
혹여 69 호수 트레킹을 하게 된다면, 꼭 와라즈에서 하루를 보내며 고산지대에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
와라즈 자체도 충분히 산소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는 고산지대라, 스스로가 고산병에 얼마나 취약한지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와라즈 시내 자체는 딱히 볼 게 많진 않다.
볼거리 중에는 아르마스 광장이라는 작고 귀여운 광장이 있다. 너무 작아서 어느 방향에 서있어도 광장이 끝까지 모두 보일 정도로 아담하다. 로컬 할머니들이 알파카들을 데리고 와 서성이고 있어서, 관광객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당연히 돈을 내야 한다.)
왜 어지럽지? 버스 안에서 잠을 잘 못 잤나
페루 와카치나에서 와라즈까지 이동하는 것만 14시간이 걸려서 피곤한 건가 싶었다. 동행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게 고산병의 증상이었다.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가벼워지면서 생각이 느려지고, 호흡이 조금 가빠왔다. 고산병을 이렇게 실감한 건 처음이라, 그 생경함이 고통을 이긴 듯했다. 동행들과 나는 마치 영광의 상처를 입은 제군들처럼 의기양양하게 69호수 투어를 예약하러 투어사에 들렀다.
이미 한국인들이 많이 다녀가서 후기가 많은 투어사였다.
1만 원을 주고 69호수 트레킹 투어를 예약했다. 그런데, 투어사 직원조차 어눌한 한국말로 "하지 마. 고산병 아파요..."라며 우리를 말렸다. 할 줄 아는 한국말이 딱 이 두 문장인 것 같았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간다고 '갈만한' 트레킹 코스는 절대 아니라는 것을.
와라즈 중앙시장에 가니 로컬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흥정으로 추측되는 스페인어들이 들렸고, 분명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마을인데도 로컬들은 신기한지 우리를 쳐다봤다.
2019년에도 한류는 열일 중이었다. BTS, 블랙핑크, 빅뱅, 투애니원 등 아이돌 굿즈들이 여러 상점의 대문을 장식 중이었다. 나와 동행들이 빤히 보고 있으니 'Coreana(한국인)'이냐면서 말을 걸었다. 못하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현지 청소년들이 Kpop을 참 좋아한다면서 신나게 굿즈를 자랑하셨다.
길거리에서 만난 한 10대 소녀는 우리에게 한국사람이냐며 말을 걸었고, 오직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소녀는 자신이 일하는 카페로 우릴 초대해서 와플과 피자를 헐값에 대접해 주었다.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 한국에서 사 온 BTS 굿즈를 선물로 건넸다.
다음날 새벽 5시, 비몽사몽 일어나 69호수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2시간 정도 달리니 아침식사를 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2500원 하는 치킨 수프를 먹었는데, 너무 진국이라 잠이 달아났다. 식사가 끝나니 가이드가 코카 잎을 건네주었다. 식사 후 더 심한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이와 입술 사이에 끼워놓는다고 한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코카 잎은 마약 코카인을 추출하는 그 식물의 잎이 맞다.)
69호수로 가는 길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우아스카란 국립공원에 들른다. 공원에는 양가누코라는 청록빛 호수가 있는데, 얼마나 잔잔한지 그 위 암벽이 그대로 비쳤다. 다가올 고통을 모른 채 폭풍의 눈과 같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우아스카란 공원을 지난 후 버스에서 내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사실 많은 한국인들이 69호수를 등반한 후기를 보고 만만하게 생각한 마음이 있었다. 내 젊음을 막연히 믿기도 했고, 평소에 험한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힘들더라도 하루 정도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큰 오산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69호수 트레킹은 가장 힘들었던 여행 기억 중 하나다.
해발 3900m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는데, 시작 지점에서 고산병으로 제일 고생을 했다. 약간의 경사를 걸을 뿐이었는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마치 숙취와 같은 두통이 왔다. 다른 동행들은 갑자기 잠이 오거나 심한 편두통을 느낀다고도 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태산인데, 벌써부터 힘드니 남은 여정이 두려운 순간이었다.
약 40명 정도 되는 관광객들과 가이드 두 명이 함께 트레킹을 했는데, 관광객들 중에는 한국인도 많고 유럽인, 남미인들도 보였다.
해발 4100m 정도에 다다르니 길이 더욱 험해지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을 배려한 포장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서슴없이 올라가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자갈밭을 올랐다. 산에는 소가 사람보다 많아서 평생 볼 소똥은 다 본 것 같다. 야생 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인들이 방목해서 키우는 거란다. 소들은 대부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해발 4400m에 도착하니 '지옥의 구간'이라 불리는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대한 인간이 오를 수 있도록 가파른 돌 절벽에 좁은 길을 억지로 만들어놓은 꼴이었다.
험한 말이 그냥 나왔다. 주변 외국인들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한 프랑스인은 가다가 길에 주저 않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고산병 약을 건네주는 것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산소 부족으로 현기증이 나는데, 길마저 어지러우니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 69호수라는 야한 이름의 호수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대체 끝은 어디일까, 포기해야 하나, 오늘의 일정으로 몸살이 나서 정작 남미여행의 꽃 마추픽추를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남자 동행은 군대 행군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말을 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등산길이라는 점과 힘들지만 끈질기게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등산객들, 그 와중에 너무 아름다운 자연풍경,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고산병이 모두 합쳐져서 몸과 정신이 모두 아찔했다.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타지에서 관광을 하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 트레킹 3시간 만에 드디어 69호수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했는데 3시간의 고통, 인내, 그리고 노력의 가치가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비현실적인 에메랄드 빛 호수를 보니 우습게도 모든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69호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호수 뒤로는 만년설이 덮인 차크라라후(Chacraraju)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호수의 아름다움 자체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완등을 했다는 뿌듯함이 거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드디어 끝났을 때와 맞먹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마치 국가대표라도 된마냥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정상 등반을 즐겼다. 무려 이 순간을 위해 미국 교환학생 전에 한국 다이소에서 사 온 태극기였다.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차례로 태극기를 빌려주었고, 다들 금메달을 딴 듯한 표정으로 신나게 인증사진을 찍었다.
등산객 중에 볼리비아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구아 데 플로리다(Agua de Florida)'라는 고산병 약을 나눠주었다. 작은 병에 담긴 액체기름이었는데, 손에 덜어서 비빈 후 그 냄새를 코로 들이키면 일시적으로 고산병 증세를 줄여줬다.
단비 같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2시간 반에 걸쳐 하산을 했다. 버스에 도착하니 일찍이 포기한 다른 관광객들이 우리를 보고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 광경이 참 우스웠다. 내 돈 내고 내가 등산을 다녀왔는데 박수를 쳐준다니.
아이폰을 확인해 보니 하루동안 115층을 올랐고, 4만보를 걸었다.
무드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을 아는가?
추억을 회상할 때 나쁜 기억은 빨리 지워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거나 과거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미화하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분명 트레킹 도중만 해도 절대 다시 오지도, 남에게 추천도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는데, 이젠 69호수를 가겠다는 친구를 보면 그저 등을 토닥여주며 응원해 줄 것 같다. (물론 나는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남미여행 중 가장 힘든 일정을 소화한 나는 페루 여행의 하이라이트,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쿠스코(Cusco)로 향했다.
Huaraz, Peru_ Key words
- 안데스 산맥(Andes)
- 코르디예라 블랑카(Cordillera Blanca)
-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de Huaraz)
- 중앙시장(Mercado Central de Huaraz)
- 우아스카란 국립공원(Huascarán National Park)
- 양가누코 호수(Laguna Llanganuco)
- 69호수(Laguna 69)
- 차크라라후(Chacraraju)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