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HOB/GTG/The Morning

aesthetics of The Weeknd

by 김윤후

더 위켄드(The Weeknd)의 미학을 분석해 보는 글이다. 그의 초반 EP 중 하나인 house of balloons과 glass table girl 그리고 개인적 최애곡인 The Morning의 미적인 유기성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려 한다.


<위켄드 초반의 음악들에 대하여>

세상에는 가공된 인공미와 날것의 자연미가 존재한다. 인공미와 자연미의 구분이 조금 우악스럽긴 하지만 가공된 것과 날것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위켄드의 경우 그가 유명해지기 전 그만의 가장 독보적인 느낌을 음악에 넣었는데, 당시에는 대중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가장 위켄드스러운'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위켄드의 음악을 듣고 처음 느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의 첫 EP의 경험이 그랬다. 음악 속 뿌리까지 뻗쳐진 특유의 허무주의는 나로 하여금 내가 알던 세상의 가장자리의 차갑고 축축한 곳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미학은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의 유기성에서 온다. 마약과 섹스, 파티에서 벌여지는 난잡한 쾌락의 소동이 아침의 피곤한 햇살과 함께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텁텁한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구조는 그의 음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쾌락주의는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다. 쾌락을 향유하는 그 순간만큼은 욕망이 충족되어 마치 인생의 궁극적 맛을 느낀 것 마냥 좋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쾌락의 항아리는 순식간에 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이 우리에게 불편한 허무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쾌락의 노예가 된 인간은 다시 쾌락의 순간을 반복한다. 이렇듯 쾌락주의는 충족되었을 때의 궁극적인 만족감과 공허할 때의 노예적 상태의 두 상반된 상태가 거칠게 상존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쾌락과 고통의 상태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시지프를 닮았다. 이렇듯 거짓과 진실이 충돌하여 부조리가 드러나면 우리는 실존적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공허한 쾌락주의는 그중 가장 저급한 실존적 상태다.

위켄드는 이 끊기 힘든 쾌락과 허무, 약에 찌든 사랑과 고통의 지겨운 고리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음악의 매력은 그의 미학 자체에서 오기도 하지만 유미주의적인 그의 예술적 태도에서도 온다. 예술은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라 말한 피카소의 말이 여기에 상응하는 듯하다.


<House of Balloons>


house of balloons promo.jpeg


표지 사진부터 리미널 스페이스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다. 타일로 된 방의 '구석'을 바탕으로 하며 상반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풍선들, 그리고 얼굴이 불편하게 가려진 남자의 모습(아니, 성별도 자세히 구별할 수 없다)이 그렇다. 표지부터 무언가 말하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이 음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도덕적, 서사적 방향성이 없다고, 난잡한 쾌락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신호처럼 읽힌다. 이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가깝다. 인간성이 결여된, 그저 물질 그 자체.

심하게 변조된 목소리의 괴이한 형태로 시작되는 음악은 시작부터 기계적이고 눈먼 쾌락주의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 음악은 메시지에 대해 도대체가 가만히 있어 고찰해 볼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애초에 메시지 자체가 없으니 당연한 것일까? 음과 노래는 저돌적이고 가차 없이 진행되어 리스너들로 하여금 음악의 순간적이고 전체적인 노래의 해로운 분위기에 매료되게끔 만든다.


<Glass Table Girl>

익숙한 HOB의 기괴한 비트가 갑자기 더 일그러진다. 강렬한 쾌락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쾌락에 무아지경이 되어 인간 가죽만을 뒤집어쓴 수많은 고깃덩어리가 서로 엉키는 모습이 음악을 통해 보인, 아니 느껴진다. 괴이하게 일그러진 비트는 쾌락의 절정이 지옥과 다를 게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당사자들에겐 이만한 천국이 없겠지만 그 모습은 지옥과 다를 게 없다. 칼날 위에서 살이 찢겨나가는 것도 모른 채 무아(無我)의 춤을 추며 광인처럼 웃는 모습이 지옥도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The Morning>

새벽이 지나고 낮의 태양 빛이 강타해 온다. 시작부터 늘어지는 듯한 신시사이저의 강력한 음은 피로한 강렬한 태양빛을 그대로 청각상으로 옮긴 듯하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12시가 넘어 1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방의 불을 켜놓은 상태라 그 인공적인 하얀빛이 나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에 이 음악을 들으니 마치 12시와 1시라는 시간 상 사이에 영원히 갇혀서 노래 속 방황하는 신시사이저 음처럼 내 정신은 왔다 갔다 했다. 그 와중에 진행되는 위켄드의 황홀한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기계적인 분위기 속 인간적인 무언가를 상기시켰다. 쾌락의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실존의 고리 속에서 방황하는, 더 나아가 영원한 구원을 원하는 인간 내면의 진실된 소망이 보였다.


_ (4).jpeg





공교롭게도 구원에 대한 이러한 요청은 위켄드의 가장 최근 앨범 [DAWN FM]에 담겨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화 <드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