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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죽음의 죽음을 죽이자. 시간을 되찾자.

by 김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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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건전한 이성이라고 이름 붙인 일반적인 통념은 참을 수 없이 따분해. 가장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신이고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라고 멋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사내였어."

-<당통의 죽음>


"소음의 부정은, 소음의 죽음은 침묵과 고요이다. 중독자들은 바로 이 고요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죽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음은 죽음을 배제한 살아있음의 표출이다. 소음은 이제 죽음의 죽음이 된다. 그래서 중독자들은 불면증 환자들이다. 그들은 죽을 수 없는 만큼 잘 수도 없다. 잠은 죽음의 사촌이기에(sleep is a cousin of death), 죽음마저 죽인 중독자들은 살아있음의 저주에 갇혀 버렸다."

-<죽는법>



후회는 방치에서 온다.


이제 방치된 아이들을 마주하러 가자.




눈이 내린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차가움인가 하고 K는 이 신선한 차가움이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과거의 기억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기억이 모두 뒤죽박죽이었다.

어떠한 맥락도 없었고, 서사도 없었다. 그가 가진 기억이라곤 늙지 않은 사건의 파편들에 불과했다. 마치 네온 광고판에 여러 사인들과 장면들이 거침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은 죽지 않고, 현재 속에 박제된 이미지들 뿐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아직 통일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산만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우월한 상징으로 통일하고픈 영혼의 죽지 않은 갈망을 그는 품고 있었다. 끔찍한 공허와 집착, 중독으로 인해 그는 멈추다 못해 퇴화하기 시작했고, 무너지는 모래 바닥처럼 그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 열망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모래 속에서 겨우 붙잡았고 영혼의 유일한 닻이었던 상징에 스스로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의 광기에서 구해줄 구원의 사원을 찾았다.

세상 끝에 있는 이 사원은 모든 기억과 과거가 응축되어 있다. 안갯속에 갇힌 미래지향적 건축물 사이 보이는 영롱한 빛으로 그는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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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매끈하고

고요한



그는 흰 의자에 앉아서 공간을 둘러본다.

기억의 시뮬레이션이 전부인 공간, 이곳의 영롱한 공간감은 기억이 소음이 되지 않도록 정화해 주었다. 기억의 공명은 노이즈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선율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기억의 종류가 스크린에 뜨기 시작한다.



텍스트


음악


시네마


사건




나는 이들이 서로 종합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하나로 모여 하나의 원의 형상으로 번쩍하더니 흩어져 버렸다.


나는 손을 뻗어 앞에 놓인 헤드폰을 썼다. 눈을 감은 상태로.


헤드폰이 주는 말끔한 고요는 피로를 해소해 주었다.


이 초라한 최후의 인간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진정으로 영원한 것을 찾아 그것의 안식으로 '죽으려고 한다.' 죽자꾸나. 내게 안식일 주거나. 그리고 이 영원한 새벽을 끝내고, 이 연옥에서 벗어나서, 여명을 보자꾸나. 진정으로 아침을 맞이하자...!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나침판은 자꾸만 북쪽을 가리킨다. 그곳이 가리키는 곳에는 완성의 신화가 끝을 맺는 곳이 있다. 이 모든 운동에는 방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 답을 거의 찾았다고 생각했다. 최근 6개월 동안, 그 순간은 비록 타이밍은 이상했지만, 그 답을 완결 짓는 데 있어 매우 근접했었다. 그러나 원숭이들이 신들의 자리를 꿰차더니, 못생긴 하강이 일어나고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다양성은 이제 회색 폭풍 속에 휩싸여 소멸해가고 있었다.


이 못생긴 하강은 소음의 형태로, 죽음의 죽음의 형태로 다가왔다. 소음은 자꾸만 나의 이 '답을 찾고자 하는 꿈'을 유예했다. 그래서 지금 내 꼴을 보라. 수능은 몇 개월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자폐짓이나 하고 있다. 모든 꿈은 현실과 입맞춤하기를 실패했고, 이제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가려고 한다. 꿈의 영원한 신성은 이제 심연이 되어 주변을 흡수해 가기 시작한다. 이루지 못한 꿈들의 실들은 하루 종일 나에게 나타나, 마치 글리치처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원혼들처럼 나를 괴롭힌다. 나는 이제 잠들지 못한다. 나는 안식일을 빼앗겼다. 나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저주에 걸려버렸다.


다시금 잠에 들 수 있는 방법은 못다 한 꿈들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을 모두 융합하는 거대한 꿈을 자장가처럼 불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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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대한 운명의 어머니의 꿈의 자장가를 들으며,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의미는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고행하는 자는 안티고네의 얼굴을 한다.




거대한 어머니는 창조의 완결을 약속하는 자이다. 그녀는 말한다.


"너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을 암시해 준다.


"드래곤 신화"




자 이제 위대한 자장가를 완성해 보자.



<글의 배경>


나의 주관적 서사에 대한 기록은 이미 <밀실 철학>으로 그 역사의 형태를 마련했다.


거대한 서사시의 윤곽을 그려내었지만, 나는 나의 나약함으로 인해 너무나도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 못생긴 역사는 '네이버 블로그'에 여러 차례 기록해 두었다.



그 못생긴 역사는 내가 이 글을 쓰는 배경이다. 이에 대해서는 맨 처음 작성한 네이버글들에 충분히 쓰여 있는 것 같으니, 여기서 추가적인 서술은 자제하겠다. 다만 짧게 요약하자면, 나는 죽음에 죽음을 주는 소음으로 인해 집중과 중심이 완전히 산재된 상태였고, 안정과 지속, 서사와 완결을 향한 형이상학적 욕구를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래서 게으름을 이기고, 제대로 죽기 위해, 즉 모든 내러티브들을 청산하기 위해 '꿈'이라는 거대한 그릇으로 서사의 받침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오늘의 현재화" 속에 "실종"되며, 이로써 자기 자신의 연속성을 상실한다. 조급성의 시대는 "산만"의 시대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산만성"과 "무연관성"에서 건져내 추스르고자 하는 욕구가 깨어난다."

-<시간의 향기>, 한병철


나는 이제 시간적 거주를 찾으려고 한다.

점-시간의 무맥락성으로부터 시간의 고유한 지속성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왕복적 운동'을 긍정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즉 결단하는 현존재가 됨으로써 시간에 대한 주권을 되찾고자 했다. 하이데거의 고유한 시간은 '들길'로서 표상된다.


"왕복운동은 길을 목표에서 해방시키지만, 그렇다고 산만성의 파괴적 힘에 내던져버리지도 않는다. 들길에는 뭔가 독특한 집중성이 내제 한다. 들길은 뻗어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 들길은 방향이 정해져 있는 시간, 경련하는 듯한 노동의 시간을 잠잠한 지속성으로 만들어준다. 사색적 머무름의 장소로서 들길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도 필요하지 않은 거주의 이미지, 신학이나 목적론이 없어도 괜찮은 그런 거주의 이미지가 된다."

-<시간의 향기>


하이데거는 토착성으로 하여금 거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머무름은 존재를 심화한다. 그것이 만드는 독특한 집중성은 마치 중력처럼 작용해서, 산재된 점-시간들을 다시 지속성으로 묶는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집착, 고유함에 대한 집착은 권태로 이어진다(한편 진솔한 고유성을 보다는 표면에 비친 진정성만을 갈망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급적 집착으로부터 죽음 충동을 경험한다. 권태는 타자를 수용하는 자아의 병이며, 죽음 충동은 타자가 없는 자아의 병이다).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의미를 고안해 내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는 태도에서 깊은 권태의 징후를 발견한다."

-<시간의 향기>


의미의 공허는 시간의 공허가 그 배후에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지속성이 지닌 안정감을 잃는 것은 곧 시간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고, 이는 총체적 의미의 공허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주체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이러한 공허함을 깨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권태의 기원은 주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바로 이 주체성으로 인한 고향의 상실에 있다. 자기의 시간이 죽어야 거주하는 근원이 있는 고향에 들어설 수 있다. 고향은 행위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기 하이데거는 행위보다는 '느긋함', '수줍음'에 더 집중한다. 그것은 관조를 전제한다. 관조는 신들의 한가함으로, '노니는 놀이'의 바탕이 된다. 한가로움, 관조는 그래서 위대한 자유와 다름 아니다.


"반면 한가로움은 삶의 필요 너머에 놓인,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시간이 향기>


한가로움은 이제 나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한 집중력을 선물한다. 그 집중력은 위에서 본 '들길'의 집중성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관조적 사색이 주는 감각의 집중이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슷하기는커녕 그것에 정반대 되는 것이다. 한가로움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머무름은 감각의 집중을 전제한다."

-<시간의 향기>


이제 나뿐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지속성의 리듬으로 하여금 다가온다. 이것을 한병철은 '우호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세계는 나에게 우호적이게 된다. 풀 숲 위 나비를 쫓는 어린아이처럼, 나비가 된 장자와 장자가 된 나비처럼 모든 것은 서로 섞인다. 다만, 그것은 가산적인 카오스가 아니라 이성적인 카오스다. 이들은 서로 섞이면서 서로 질서와 유기성을 구성해 간다. 세계 안에 개체가 있고, 개체 안에 세계가 있다.


자아와 세계가 우호적이게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동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위의 감각과도 같은데, 행위가 닿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을 감지하는 감각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수동성이 필요하다. 경험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주체의 활동성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의 다가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향기>


이것은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이다.


다만 활동적 삶(vita activa)이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성숙은 이 둘의 화해에서 온다.


https://blog.naver.com/yunhoo0704/223835295101


관조와 행위의 화해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특별히 자세히 다루었다. 참고하길 바란다.




Myth of Dragon


시간의 재구성은 다음의 당연한 수순을 거친다:

"과거(돌아봄)-현재(바라봄)-미래(내다봄)"


돌아보는 건 이제 지쳤다.

그 일은 이미 <밀실철학>에서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다시는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과거에 무슨 끔찍한 기억이 있어서는 딱히 아니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자폐를 더욱 강화한다. 그 일은 같은 루프에 갇히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돌아봄은 이제 공허한 반성이 되었다. 깊이는 점점 얇아지고, 정수는 점점 소모된다. 그리고 과거는 껍데기만 남아서 볼품없게 된다.


"과거였던 것은 시간의 수면 위로 발가벗겨진 채 끌어올려져 내동댕이 쳐진다. 축축한 기억은 향기를 잃어버리고 그 이미지만 추출되어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고장 난 기계처럼, 기억은 그저 사물이 되어 쓰레기처럼 쌓일 뿐이다."

-<죽는법>


향기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와 미래의 일만 쓰려고 한다. 나는 나의 리추얼을 안다. 내가 무슨 상징에 끌리는지, 무슨 영원성에 끌리는지 나는 잘 안다. 이제는 그것의 실현할 문제를 도모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이제 직선적인 시간, 그 서사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과거의 기록과 작별하고, 오직 이 글의 현재성에만 근거하여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적 집중은 그 목적을 분명히 알 때 극대화된다. 그래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 건가? 도대체 어떤 씨앗을 품고 있기에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몽상을 버리지 못하는가? 무엇을 유예하고 있는가? 무엇이 꿈틀대는 것인가?"





-밀실철학을 넘어서


<밀실철학>은 돌아봄의 철학이다. 그것은 고유하고 미스터리하고 강렬하다. 밀실 속 쓰레기 속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이제는 '바라봄'과 '내다봄'의 철학을 해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돌아봄 없는 철학이 과연 가능한가? 비록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공허하진 않을까?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싶다.


1) 철학이 정신의 가장 자유로운 활동이라면 그것은 직선적 시간을 초월해 있다. 직선적 시간은 서사의 시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있는 시간이다. 서사는 안정적이지만,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속할 가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선적인 시간(근대인들의 시간, 동적인 시간)이 아니라 관조적이고 신적인, 정적인 신화적 시간에 거주해 있다. 신화적 시간은 리추얼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리추얼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져오던, 직선적 시간에서 자유로운 향기로운 시간이 등장한다. 향기는 일직선이 아닌, 사방으로 그 영향을 넓힌다. 리추얼에서는 영원함이 살아난다.


"축제는 말하자면 건물처럼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축제를 다닐 수 있다. 축제 시간은 서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다. 흘러가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축제 시간은 거주를 가능케 한다."

-<리추얼의 종말>, 한병철


거주의 영원한 존속은 '사물'의 본성으로 잘 드러난다.


"사물들은 삶을 안정화하는 고정된 말뚝들이다. 리추얼도 똑같은 기능을 한다. 리추얼의 같음을 통하여, 반복을 통하여, 리추얼은 삶을 지속적이게(멈춤 가능하게) 만든다."

-<리추얼의 종말>


따라서 철학의 본질이 리추얼이고, 자유의 활동이라면, 과거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2) 과거는 돌아볼 때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내게 있다. 과거가 과거라는 고유한 시공간에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과거는 언제나 연장으로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흔적으로서 현재에서 연명한다. 그것은 나의 몸과 정신에 체화한다.

돌아봄이란 그저, 현재와 과거를 떼어 놓는 기만을 행하는 행위, 즉 과거와 현재의 '근원적 거리'를 만들어서 향수와 반성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을 때 과거는 되려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일부가 된다. 과거는 흔적이다.


상처, 아름다움 모두 하늘에 별들로 새겨져 버린다. 붉은 빛이든, 푸른 빛이든.










하지만 언제나 밀실철학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기묘한 꿈의 형태로.

그리고 나는 그 바래진 쓰레기 더미를 방랑하겠지.


https://youtu.be/BfY7TfeGqV0?si=FFmM4dS5EyXa1l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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