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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02. 2021

큰올케 언니, 송 ㅇㅇ님. 3/3

  미국으로ᆢ


 2015년 5월.

 17개월, 37개월 된 두 손주가 있는 둘째네와 살림을 합했다. 7월에 사위가 직장에서 제공하는 일 년 기한 미국 연수를 떠났다. 두 달 후 딸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LA로 향했다. 나도 정착 도우미 임무를 맡아 동행하게 되었다.


 사위는 본인이 공부할 대학 UCLA에 가까운 곳보다는 가족들이 생활하기에 편한 곳으로 집을 구했다. LA의 다운타운에 있는 공동주택단지 파크 라 브레아.

 그런데 신기하게도 승용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조카가 살고 있었다. 그 넓은 미국 땅에서 이런 우연은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조카는 우리 큰올케 언니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2남 1녀 중의 막내아들, 요한 목사님이다.


 조카의 특별히 남다른 삶도 감동적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선하고 착실하게 성장하여 고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남편에게 실망한 삶에서 우리 언니에게는 얼마나 큰 희망과 자랑의 끈이었겠는가?


 그런데 조카는 엄마의 소망과는 아주 다른 길을 걸었다.


 순수하고 전혀 때 묻지 않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 부산에서 올라와 낯선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UBF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를 알게 되어 곧장 그 세계에 몰입하였다.

 항상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있었고 우리가 가끔 주는 용돈도 반드시 십일조를 바쳤다.


 우리 7형제를 비롯하여 가까운 친인척 모두를 통틀어 크리스천은 내 바로 밑 여동생 한 명뿐이었던 때다.

 순수하고 뜨거운 믿음의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군대를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UBF 가족 중 한 명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는 맨손으로 베네수엘라로 떠났다. 본부에서 내린 선교 사명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마음 아프게 공항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후 언니의 상심과 우울은 심각할 정도로 깊었다. 강한 성격만큼 고통도 크게 겪으셨다.


 조카며느리가 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에 근무했다. 조카는 생면부지의  막막한 베네수엘라라는 낯선 곳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선교의 씨를 뿌렸다.

 대학생 젊은이들을 하나 둘 본인의 집으로 데려다 빵 한쪽이라도 나누교회에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복음을 나누었다. 거의 초대 교회의 삶을 살았다. 대형 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와는 달리 UBF 단체는 본부에서의 어떤 금전적 후원이 없이 오로지 현지 선교사들의 자생력으로 선교의 씨를 뿌려야 했다.


 선교 활동과 현지 언어 습득과 법학 공부를 병행하며 험한 고생길을 걷고 있는 중에 아기가 태어났다. 조카며느리는 직장 근무를 해야 했고 조카는 밤낮으로 일에 전념해야 했다.

 당신의 손주인 갓난 아가를 돌보기 위해 언니는 베네수엘라라는 생판 낯선 곳으로 날아갔다. 고추장, 된장, 김치, 찹쌀 등등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최대의 한국 먹거리들을 챙겨 들고서.


 말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멀고 먼 낯선 나라에서 오로지 아기 돌보고 어른들 밥 해 먹이는 일에 헌신했다. 3년 만에 귀국했지만 얼마 후 둘째가 태어나자 또다시 베네수엘라로 달려가 고생하는 아들네 살림을 2년 더 돌보아 주었다.


 세월이 흘러 조카 내외가 지극 정성으로 뿌린 선교의 씨앗이 열매를 기 시작했다. 함께 성경 공부를 했던 젊은이들이  베네수엘라의 장관이 되기도 하고 한 명 두 명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기업의 베네수엘라 사업 진출에 현지에서 법을 공부하였고 인맥도 있고 언어 소통이 되는 조카가 발탁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과의 시차 관계로 밤낮없이 두 나라를 상대로 사업에 몰두하고 사역에 헌신하느라 두 아이들은 어릴 때 아버지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고 한다.


 현지 교회도 부흥하고 경제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금을 요구하는 현지인에게 조카가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사일생 위기를 모면하고 UBF 본부와 상의하여 그동안 육성시켜 온 현지인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조카는 미국 LA로 와서 신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 출발이 정해지자 나는 딱 언니 생각이 났다. 부산에 사시는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 미국 가는 길에 동행하지 않으시겠느냐고.

 74세인 언니는 바로 움직이셨다. 여권을 갱신하고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또다시 난생처음 가는 미국 길에 올랐다.


 둘째와 아가 손주 둘, 나 그리고 언니, 이렇게 여자 어른 세 사람이 아가 둘을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허용된 이민 가방 열 개에는 온갖 아가용품들을 다 쓸어 담았다.


 14시간의 비행 후 도착한 LA 공항.


 독립심이 강한 둘째는 외숙모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긴 비행시간 내내 집중하여 두 아가들을 성심껏 보살폈다.

 마중 나와 있는 사위와 조카를 만나 나는 둘째네로 언니는 아들네로 헤어졌다.


 미국에서 맞이하는 첫 일요일.

 딸네 가족과 나는 조카네 집으로 향했다.

 이웃에 사는 미국인 한 명과 그 집 아랫채머물며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는 UBF 가족 한 명, 조카네 가족 네 명, 딸네 가족 네 명, 언니와 나, 열두 명이 아랫채 거실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조카가 설교를 하고 조카며느리가 오르간 반주를 하고 손주가 영상기계를 조작하고 손녀는 노래를 맡았다. 담백하고 쉬우면서도 내용이 알찬 조카의 설교도 좋았다. 영상도 많이 준비해서 시청각 자료로 활용했다.


 예배 후 푸짐한 점심 식탁이 차려졌다. 올케 언니의 음식 장만 실력이 당장 빛을 발하였다. 싱싱하고 간이 맞고 향긋하기까지 한 맛있는 포기김치가 푸짐하게 상 위에 올랐다. 내가 거의 반 포기를 먹었지 싶다. 커다란 통으로 한 통 얻어오기까지 해서 한동안 요긴하게 잘 먹었다.


 조카네 집은 '라 카냐다'라는 고급 주택 단지 안에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Frank  Lloyd Wright 가 설계했다는 단독 주택은 아랫채와 아담한 정원을 갖추고 있는 단층집으로 아늑하고 넓고 편리했다. 주위에 수영장까지 갖춘 웅장하고 큰 집들과 꽃과 나무로 잘 가꾸어진 도로들은 한적하면서도 공원처럼 아름다웠다. 아침 산책길로 훌륭했다.


 주택 단지 초입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롯데마트가 있었다. 공항에서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기 바쁘게 언니는 긴 비행의 여독도 잊고 그곳에 있는 배추 열 포기를 모두 다 사 와서 밤을 새 가며 배추를 절이고 김치를 담았다고 한다. 물론 양념은 언니가 한국에서 다 공수해 왔다.


 나는 한 달을 머무를 계획이었고 언니는 체류가 허락되는 석 달을 다 채울 생각이었다. 한 달 동안 조카의 배려로 언니와 함께 미국 여행을 제법 다녔다.

 캐나다가 포함되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뉴욕, 워싱턴을 경유하는 4박 5일간의 미국 동부 패키지여행.

 조카가 운전하여 미국의 1번 국도를 따라 태평양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다녀온 2박 3일 자동차 여행.

 조카며느리가 운전하여 샌디에이고를 포함한 남쪽을 둘러본 1박 2일 휴양지 여행.


 조카네 집에서 며칠 머물기도 하면서 조카가 인도하는 일요 가정 예배에는 될 수 있으면 참여하려고 했다. 예배 후의 식사는 항상 풍성하고 즐거웠다.

 한 달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석 달을 계획했던 언니도 나와 함께 한 달 만에 돌아왔다.


 꽃다운 새색시였던 언니와 여덟 살짜리 꼬맹이었던 내가 언니의 첫 친정 나들이 2박 3일 여행을 함께한 이후 53 만동행이었다.

 70대인 올케언니와 60대인 시누이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특별한 여행이었다. 언니를 위한 화려한 마지막 해외 나들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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