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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01. 2021

큰올케 언니, 송ㅇㅇ님. 2/3

  "시어마씨 용씸은 하늘에서 내려온대이."


 그 해 여름 방학, 올케 언니의 첫 친정 나들이 때다. 언니는 당신의 친정으로 나를 앞세우고 가셨다.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새침데기라 데리고 다니기 편했던 것 같다. 언니는 옅은 화장을 하면서 내 입술에도 빨간 루즈를 발라 주고, 예물로 받은 시계와 목걸이와 반지로 치장을 하고 예쁜 꽃무늬 양산을 쓰고 어린 시누이인 나의 손을 잡고 친정으로 향하셨다.


 언니네 친정집은 동래 금정산 바로 밑자락에 자리 잡은 크고 넓은 농가였다. 마루에 달린 뒷문을 밀쳐 열면 좁고 긴 툇마루가 있고 통로로 쓰이는 뒷마당이 있고 바로 뒷산 경사진 비탈이 눈앞에 보였다. 그 서늘한 비탈을 타고 내려오던 상쾌한 한 줄기 바람, 툇마루 밑에 쌓여 있던 땔감들, 집 뒤 벽에 걸려 있던 갖가지 살림 도구, 농사 도구, 조롱조롱 달려 있는 각종 말린 씨앗들ᆢ.

 어른들께서는 사돈처녀 왔다고 맛있고 신선한 먹을 것과 편안한 잠자리 등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호롱불을 켜 놨는데 온갖 날벌레들이 다 모여들고 등잔 밑에는 불빛만 보고 날아들다 타 죽은 자잘한 날것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사돈어른께서 어린 나에게 본가에 가서 흉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밤이 되어 언니를 따라 물 좋은 금정산 줄기 시냇가로 갔다. 동네 아낙들이 서로의 소식과 안부를 물으며 낮 동안의 땀과 피로를 푸는 시간이다.

 낯선 곳의 밤개울에 선뜻 들어가못하는 나는 언니가 내게 맡긴 금목걸이랑 반지, 시계를 손에 쥐고 큰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검게 드리운 밤의 비단 자락 위로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펼치는 변화무쌍하고도 화려한 군무를 감상했다.

 언니랑 동네 여자들은 맑고 시원한 시냇가 물속에서 풍덩풍덩 밤 목욕들을 했다.

 언니의 예물 시계는 내가 중학교에 진학한 해에 내 손목으로 이사를 왔다.


 다음 날, 시원한 여름 아침 시간이 금세 지나가고 더운 여름 땡볕 속에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그 집 막내 사돈총각이랑 뒷산엘 올라갔다. 내 여름 방학 숙제 곤충 채집을 도와준다고 잠자리, 매미, 거미 같은 곤충들을 잡아 와서는 빳빳한 화분지 종이에다 핀으로 찔러 눌러 주었다. 식물 채집 숙제하느라 온갖 풀들을 뿌리째 뽑아 무거운 책갈피 속에 넣어 눌러 말리기도 했다.


 희로애락 온갖 일상들을 동고동락하며 그렇게 2년 정도를 한솥밥 가족으로 지내다가 큰오빠랑 올케 언니가 부산에서도 가야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영도로 분가를 하셨다.

 서른 살짜리 큰아들을 철들면서부터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고 의지하며 살아오시던 어머니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듯 서운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빠가 참 잘하신 일이다.


 영도로 큰오빠를 분가시켰을 때, 그로부터 6년 후 큰언니가 결혼하여 서울에서 신혼살림 차렸을 때, 또다시 10년 후 내가 서울로 이사 왔을 때.

 믿고 의지하던 장남 아들 살림 내주고 영도에서 가야로 돌아오는 길 , 살림 밑천 큰딸 신혼살림 돌아보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 아끼고 신뢰하던 셋째 딸 이사시키고 또다시 서울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먼 길을 계속 울고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독립시키느라 떠나보내는 일은 참 많이 아프고 힘든 일이다. 품에 있을 때는 사느라고 바빠 넉넉하게 품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품을 떠나 독립할 때는 가슴 한구석 휑하니 뚫린 구멍으로 그립고 섭섭한 외로움의 찬바람이 불어오니 말이다.


 오빠가 분가한 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 체육을 제외한 전과목 '수'인 성적 통지표를 가슴에 안고 오빠네 집으로 갔다. 단칸 신혼 좁은 방에서 오빠와 언니 사이에 끼어서 자고 날이 밝으면 오빠는 출근하시고 언니랑 나는 해녀들이 미역 따고 굴 따는, 바람 센 영도 바닷가로 놀러 나갔다.

 밤에는 오빠 퇴근 시간에 맞추어 두루마기 밑에 한복 갖춰 입은 새색시 언니랑 동행하여 영화를 보러 갔다.

 중구 대청동 부영극장.

 신영균과 문희, 아역 천재 배우 김정훈이 출연했던 '미워도 다시 한번'. 김진규와 문정숙이 열연했던 슬픈 운명의 영화 '낙조'.

 미남 미녀 배우들의 심각한 연기와 감칠맛 나는 성우들의 깊이 울리는 목소리가 연합하여 관객들의 눈물, 콧물을 불러내던 최루탄 영화들이다.

 영화가 끝나고 용두산 공원에 올라 밤 경치를 내려다보며 솜사탕도 사 주시고 하나 둘 셋 찰칵~~!! 사진도 찍으며 며칠을 지냈다. 오빠가 사 주신 미숫가루 맛 나는 원기소랑 빨간 당의정 영양제 약병을 들고 가야 집으로 돌아왔다.


 여섯 동생들과 아픈 아버지와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오빠는 분가를 했어도 마음의 절반은 가야 본가로 향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새댁인 올케언니의 마음은 불편했을 것이고ᆢ.


 한 가족이 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14살 손위이신 큰올케 언니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평형감각을 일깨워 다.

 자식들에게 한 명 한 명 맞춤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생활력 강하고 헌신적이었다고 추억하는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인 올케 언니에게는 별나고  세고 힘든 시어머니였을 것이다. 착하고 어질고 짠하게 느껴지는 우리 큰오빠가 아내인 올케 언니에게는 세상 물정 모르고 앞뒤 가리지 못하고 일만 저지르는 펭쎙 웬수, 미운 남편일 수 있다.

 

 우리 올케언니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두 문장이 있다.

 "뜯어만 안 가도 살겠다."

 장남으로서, 맏며느리로서 늘 신경 써야 했던 본가에 대한 경제적 책임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속상해했던 마음이.

  "고모야, 시어마씨 용씸은 하늘에서 내려온대이."

 성격 급하고 남의 시선 별로 의식하지 않는 우리 어머니의 단도직입적인 말과 행동으로 큰며느리인 올케언니가 입은 상처가 많다는 말이다.


 워낙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솜씨가 뛰어난 올케 언니이신지라 그 탈 많고 말 많은 대식구의 맏며느리가 되어 2남 1녀를 낳아 키우며 81세가 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온갖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숱하게도 많은 마음고생, 몸고생을 당신은 겪으시고 가족들에게는 시킨 남편, 86 우리 큰오빠를 아직 내치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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