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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30. 2021

큰올케 언니, 송ㅇㅇ님.  1/3

 꽃다운 새색시

 

 내가 8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2년 겨울 정초, 음력 12월 16일.

 스물일곱 살의 큰오빠와 결혼해 우리 집으로 시집오신 스물두 살 꽃다운 새색시 송ㅇㅇ님, 우리 큰올케 언니. 훤칠한 키와 흰 피부에 날씬하면서도 건강한 미인이셨다.


 맨 맏이이신 큰오빠 밑으로 줄줄이 동생들이 여섯이나 되었다.

 여덟 살 나, 여섯 살 여동생, 네 살 막내 남동생. 이렇게 세 명의 코흘리개 시누이, 시동생.

 고집 세고 큰 눈 잘 부라리는 초등학교 6학년 첫째 시동생.

 멋 부리느라 정신없는 철부지 열여섯 살 둘째 시누이.

 너무나도 만만찮은 동갑내기 스물두 살 큰시누이.

 목소리 크고 에너지 넘치며 아직은 한창 청춘인데다 장남인 큰오빠와 장녀인 큰언니에게 가정의 모든 대소사를 다 의논하시던 마흔여섯 살 시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아 쉬고 계시는 쉰셋 시아버지.


 한마디로 고생문이 훤한 대가족 집안으로 시집을 오신 것이다.


 큰올케 언니는 동래 범어사 바로 밑, 공기 좋고 물 맑은 금정산 아래에서 넓은 농토를 가지고 큰 농사를 짓는 농가의 삼남 삼녀 중 둘째이며 장녀이셨다.

 농사일에 파묻혀 지내시던 부모님은 올케 언니 바로 위의 오빠인 장남은 부산대학까지 공부를 시키셨지만 장녀인 올케 언니는 넘쳐나는 집안일, 농사일을 도와주는 큰 일몫을 담당시켰을 뿐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동네 아주머니의 중매로 큰오빠와 인연이 닿아 선을 보되셨다.


 당시 경찰에 몸 담고 있었던 우리 큰오빠는 인정 많고 싹싹하고 부지런한 성품과 어른 섬길 줄 아는 예절 바른 태도와 반듯하게 잘 생긴 외모로 첫눈에 맏사위 감으로 합격하셨던 모양이다. 우리 오빠도 풋풋하고 건강한 미인인 올케 언니가 첫눈에 마음에 드셨을 것이다.

 순조로운 첫 만남으로 바로 혼담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 사정을 세세히 조금 더 살펴보고 알아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어진 언니 쪽에서 결혼을 거절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오빠의 직업이 경찰인지라 무서워서 파기 못하고 혼사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그로부터 60년이 다 되어 가는 요즘도 언니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그때 그 일을 단골 레퍼토리로 읊으신다.

 "그때 때리치았어야 되는데ᆢ."

 걸어온 역사와 그 심정을 충분히 아는 나도 웃으며

 "에구 고생하신 우리 언니~~!"

 하고 맞장구를 친다.

 내가 봐도 한마디로 고생길이 훤한 시집살이를 오신 것이다.


 부산시 중구 대청동 '대청장 연주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15년 후 내가 결혼한 부산역 앞 '행복 예식장'에 비해  얼마나 세련된 이름인가?^^ 

 마이크로버스라고 불렀던 합승 버스를 한 대 대절해서 집 앞 골목에 대기시켰다. 그 차에 우리 집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앉고 서고 해서 빼곡히 타고 갔다.

 학교 가느라 매일 걸어 다녔던 500m 정도 되는 골목길을 난생처음 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차창 밖으로 나무랑 가게들이 휙휙 뒤로 움직여 가고 있어서 너무나 신기하고 어지러웠다.


 오빠 결혼식 덕에 여동생과 나는 똑같은 새 옷을 한 벌씩 얻어 입었다. 그 당시로서는 아마도 최신식 고급 옷이었으리라. 다오다라고 부르던 나일론 겉옷감에 안감은 융이라고도 하던 두꺼운 하얀색  천. 그 중간에 두께가 0.5cm 정도 되는 노란색 스펀지가 옷 전체에 깔려 있는 아래위 한 벌 짜리, 모자까지 달린 빨간색 방한복.

 그 옷은 맘에 쏙 드는 기분 좋은 단골 외출복이 되었다.

 학교 교실 난로 앞에서 불을 쬐다가 뜨거운 난로에 소매 끝이 슬쩍 닿았다. 바로 녹아 쪼그라들어 버리는 나일론 .  뚫려 구멍 난 소매 끝 흠 자국이 두고두고 얼마나 속 쓰렸던지ᆢ.

 포켙 안 쪽으로 구멍을 내고 손을 어넣어 조심스레 스펀지를 뜯어내서는 애지중지 모서리를 잘라 맞춰 미닫이 나무 필통 바닥에 깔고 다니기도 했다.


 드디어 시작된 새색시 시집살이.

 한 집에서 복닥복닥 모여 사는 명의 식구들 의식주 뒷바라지가 오죽했을까? 

 기억력 좋은 두 살 아래 여동생은 사람 좋아하고 바깥 활동 좋아하는 어머니는 거의 집을 비우고 안 계셨다고 했다.

 몸이 불편하신 시아버지 모시기, 끝없는 밥상 차리기와 빨래와 청소는 새색시인 올케 언니 몫이었을 것이다.


 남향 마당을 향해 열려 있는 미닫이 부엌문을 넘어 낮은 흙 계단 하나를 내려가면 부엌이다. 반질반질 다져진 흙바닥 부엌 한편에 땔감 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삼시 세끼 시커멓고 커다란 무쇠솥에서 무럭무럭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또닥또닥 나무 도마 위에 칼 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길게 쳐져 있는 굵은 철사 빨랫줄 위에는 거의 매일 온갖 빨래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학교 다니는 네 학생들 교복부터 대식구들이 덮고 자풀 빳빳이 먹인 광목 이불 홑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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