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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Feb 19. 2022

놓아 버린 나

  일과성 완전 기억상실증


 "언니야, 우째 됐노?"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의 전화다.

 "응, 잘 다녀왔다. 이상 없다 카더라."

  "응,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얼마나 걱정했다꼬ᆢ."


 목소리 큰 동생은 이어서 바로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야,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맨날 돈 달라는 소리나 하고ᆢ. "

 "언니야, 미안하다. 언니 고생만 시키고ᆢ."

 "언니야, 다행이다. 눈물로 기도했다."


 나도 눈시울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감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니가 더 고생이 많았지. 내가 뭐 고생했노? 니가 항상 애쓰고 수고가 많다."

 "언니야,ᆢᆢ"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던 동생은 알았다면서 전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빨리 말을 남겼다.


"또 전화하자."


 계속 들고 있는 수화기 너머로 동생의 울음소리가 멀어지면서 전화가 끊겼다.

 10개월 전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찾아온 남편의 식도암 발병 진단 이후 우리를 위해 정말 간절히 기도해 주고 있는 동생이다.


 천천히 감정을 추슬렀다. 전화를 받고 있던 거실 한 모퉁이에서 돌아섰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저쪽 부엌에 있는 손주들에게로 향했다.

 지난 토요일, 눈 내리고 어스름 깔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좀 많이 울고 난 후라 마음이 조금은 정리되어 있었다.


ㅡ ㅡ


 2021년 12월 13일 월요일, 아주 추운 날.

 7시부터 시작한 아침 식사 준비와 집안일을 대강 끝내고 얼쩡거리다 보니 어느덧 11시다.

 11시 반, 집을 나섰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10시가 조금 넘으면 아침 운동을 나가는 남편이 곧 돌아올 시간이다. 산책 나가기 전 자신의 점심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며 눈도장 찍은 남편 몫의 점심은 냉장고 선반 맨 앞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다.


 조그만 퀼트 손가방에 시집 한 권과 이면지와 필기도구, 돋보기안경 그리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간단한 점심과 보온병 하나를 챙겨 넣었다. 윗도리 포켓 양쪽에는 지갑과 핸드폰을 나누어 넣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가 끝났다.

 딱히 정해진 갈 곳은 없다. 24시간 숨 막히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집안 분위기가 너무 버거울 뿐이다.


 코로나 시대라 썩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도서관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만나는 체온 측정기와 백신 접종 완료 QR 코드 입력기. 입장 절차를 마치고 돌아서면 최근에 설치된 자동 주문기가 우뚝 서 있다. 키오스크라는 낯선 이름이다.

 내 성향은 아니지만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한다. 미래 사회를 예측하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수명 연장, 무인화, 홀로' 라고 하니 외면할 수 없는 도전 중의 하나가 차가운 물질문명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다. 홀로ᆢ.

 라테 한 잔을 입력시키고 내 지정석에 앉았다. 코로나로 그리 복잡하지 않은 덕분에 이 자리는 거의 항상 비어 있다.


 두 시간 가량 브런치 글을 읽고 댓글도 달고 친구들 카톡방을 넘나들다가 2시경 점심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공원 벤치에 가방을 올려 두고 선 채로 서성거리며 싸 들고 온 점심을 먹었다. 냉장고 속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빵조각과 깎아 놓은 과일들이다. 바깥 기온은 낮고 바람도 세었다. 추위 속에서 옹송거린 자세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늦은 점심 식사를 때웠다.


 한순간, 뭔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왔다. 내 몸이 어떤 힘에 의해 뒤로 화악 밀려나며 진공 속으로 조그맣게 줄어드 느낌이 들었다. 블랙홀이라는 게 이런 걸까? 불길한 예감과 막연하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고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울리는 듯했다. 천천히, 차분히 움직이자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일단 카페로 가서 남겨 둔 짐들을 챙겨야 했다. 점점 멍해지는 가운데 빈 잔이 얹힌 쟁반을 데스크로 가져다주고 직원에게 수고하시라는 인사까지 건네고 카페 문을 나섰다. 몽롱한 안갯속을 걷는 기분으로 카페 앞 계단을 내려와 대로변에 들어섰다.


 아슴푸레해지는 의식 속으로

 '아, 우리 집이 이 근처인데ᆢ?'

 '찾아갈 수 있는데ᆢ?.'

 '가서 한숨 푹 잘까?'

 여러 생각들스쳐 지나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집으로는 마음이 향하지 않았다.

 근심 걱정으로 맨붕이 되어 온갖 질문을 던지며 해명을 요구할 남편을 안심시키고 다독여야 할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가물가물해지려는 의식 속에서 주위 상황들이 모두 정지된 듯했다. 한순간 한순간 나의 움직임에 총집중하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응급실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간단한 서류를 직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고쳐가며 작성했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들어섰다.


 대기실 의자에서 근처에 사는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이러이러해서 여기에 와 있다."

 초등 2,3학년 두 아이들을 학원에서 데려오는 대로 병원으로 오겠다고 하기에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 올 필요는 없고 그냥 알린다고만 했다. 그리고 가족 카톡방에도 세세히 이 사연을 올렸다. 순간순간의 모든 동작에 초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병원 직원의 안내에 따랐다. 발걸음이 허랑했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둘째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6시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공원에서 카페로 소지품을 챙기러 간 길, 그곳에서 10차선 대로를 건너 병원 응급실로 온 일들이 까마득해지며 어느 길을 어떻게 선택해서 이리로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들의 대학 진학 이후 1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병원 안에 있는 성당과 성물 판매점을 일상처럼 드나들었고 자원봉사 활동으로 워낙 익숙한 곳이라 발걸음이 절로 이리로 향했던 모양이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조치가 처해졌다. 수액이 꽂히고 심전도 검사와 MRI 검사를 하고 신경과 의사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제대로 대답을 한 것 같은데 모든 상황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1미터 바깥의 상황이 인지되지 않았다. 검사 결과로는 큰 문제가 없다면서 평일 신경과 외래진료를 권했다.


 시간은 어느덧 눈 깜짝할 새 밤 11시가 되어 있었다. 둘째는 가지고 온 승용차로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갔다. 내복 바람의 외손주들이 뛰어나와 품에 안기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일찍 퇴근한 사위가 아이들 저녁을 챙겨 먹이고 손녀 방 침대에 따끈따끈한 전기장판까지 켜놓고 내 잠자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는 바로 침대로 들어갔다.

 '아, 편하다.'

 온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똥말똥 잠이 쉬 오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든 모양이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6시 10분이다. 그대로 눈을 감고 쉬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8시가 되자 온 식구들이 등교와 출근을 준비하는 듯했다. 가족들이 모두 현관으로 나올 때쯤 가볍게 잘 다녀오라는 안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어제 저녁도 오늘 아침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투병 중인 남편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식사 고통 푸념을 반찬 삼아 꼬박꼬박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다가 한두 끼 거르니 속이 편하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1시 30분경 아들과 큰애가 찾아왔다. 부스스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져온 맛있는 음식들로 세 남매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둘째는 엄마가 따뜻한 집을 두고 추운 곳에서 그런 시간들을 보낸 것이 마음 아프고 그런 상황에서 가족방에 그리 멀쩡한 카톡 글을 올린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엄마까지 아프면 큰일 난다, 엄마를 지켜야 한다, 아빠와의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등의 의견들을 나누며 앞으로의 나의 거처를 의논했다. 세 남매들끼리의 정담과 정보가 오가며 시간이 흘러갔다.


 오후 3시경 피아노 학원에서 두 손주가 돌아오고 큰애와 아들은 각자의 집으로 출발했다. 나는 또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요일인 15일 오전 10시 반, 둘째가 예약해 둔 신경과 외래진료를 갔다.

 전문의 선생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과성 완전 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16일 오후 1시 뇌파 검사를 잡아주었다.

 거의 석 달째 끌고 있는 발바닥 통증 치료를 위해 통증과 진료도 들렀다.

 발바닥 아치 근육 노화의 초기단계라며 오래 서 있거나 과로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신발 바닥에 장치할 깔창을 추천해 주셨다.

 둘째가 바로 인터넷을 뒤져서 어렵게 찾아내어 세 벌을 신청했다. 실내화도 사 와서 자주 신는 신발 세 켤레에 모두 깔았다.


ㅡ ㅡ


 뇌파 검사 결과를 보는 날이 오늘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바로 1박 2일 간 입원해서 뇌파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잘 쉬어야 된다는 처방을 주셨다.


 자주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친구 두 명과 언니와 여동생, 이렇게 네 명에게는 근황을 나누느라 이번 일도 알리게 되었다.

 동생은 오늘의 결과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울음을 삼키느라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서둘러 전화를 끝낸 뒤끝이 짠하다.


  2021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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