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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r 13.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2

 단정했던 자매님과 후덕하셨던 어머님♡

 2015년 5월.

 17개월, 37개월 된 두 아가들을 키우며 공부와 시험에 쫓기는 딸과 직장 격무에 시달리는 사위네 살림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감히 두 집 살림합쳐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현직인 남편과 고된 업무에 쫓기는 아들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삼대, 일곱 식구가 한 솥 밥을 먹게 되었다.

 새로 구해 이사 간 집은 15층 중 5층이었다. 마침 아래층인 4층에는 같은 성당에 다니고 있는 자매님네 네 가족이 친정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이사를 하고 이틀 뒤 딸네 집이 합해졌다. 딸네가 이사한 바로 다음날 신장 투석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서둘러 함안으로 출발했다. 남편은 그 전날 이미 내려가 있었다.


 그날 밤, 병원 영안실에서 문자를 받았다. 아래층 자매님에게서 온 문자다. 나보다 열 살쯤 어리고 성당에서는 같은 단체에서 서로 의논 맞춰 잘 활동하고 있는 사이였다. 아이들 통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좀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지금의 내 사정을 알려주고 딸에게 그 문자를 그대로 보내 주었다. 문자를 받은 딸은 죄송하다며 바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뒤이어 바닥에 깔 소음 방지용 트를 주문했으며 인터넷 검색으로 가장 성능이 좋은 제품을 골랐다는 문자가 왔다. 아래층 자매님은 이렇게 잘 대응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중간에서 서로의 대화를 이어주며 아래층 자매님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딸에게는 수고했다고 전했다. 장례식과 삼우제까지 다 지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현관 입구의 복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넓은 마루에 두툼한 트가 좌악 도배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층간소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한참 어린 두 손주는 방문만 나서면 무조건 뛰었다. 매트가 깔리지 않은 어른들 방과 부엌도 끝이 없이 누비고 다녔다.


 "뛰면 안 돼, 뛰면 안 돼~~!!"


 주의를 주는 것도 잠시였다. 분명 아랫집이 조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놓고 문제 삼지 않는 아래층 이웃이 정말 고마웠다.


 엘리베이터나 바깥에서 자주 얼굴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와 자매님은 아이들을 무척 이뻐하시고 많은 덕담들을 주셨다. 주고받는 대화는 매번 비슷한 내용이었다.


 "많이 시끄러우시죠? 죄송해요."


 "에구, 애들 키우는데 그 정도도 안 될까 봐? 아유 예뻐라. 벌써 이렇게 컸어? 잘도 크네."


 감사의 표시로 계절 과일들을 간혹 택배 주문해 드렸다.

 삼 년 동안 도중에 일 년은 딸네 가족 모두가 외국 생활을 하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국에서는 1층에서 살게 되어 그런 걱정이 없었다.


 일 년 후 귀국하여 다시 일 년을 더 살았지만 아래층의 배려로 끝까지 마음 편하게 잘 지냈다.

 아이들이 다시 독립하여 자기네들 집으로 이사하고 난 후 그 자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부터는 텐션이 다르더라고요."


 하긴 네 살, 다섯 살 두 녀석들이 항상 뭉쳐 다녔으니 오죽했을까? 다행히 그때는 유치원 종일반을 다니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말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정이 들썩거려서 전쟁 난 줄 알았어요."


 어느 날은 큰딸네 가족 네 명까지 합세해서 열한 명의 우리 가족 모두가 새로 이사할 집을 둘러보러 간 날이다. 한동안 비어 있었던 집에 갑자기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울리고 네 명의 손주들은 넓은 베란다와 거실, 여섯 개의 방들을 마구 뛰어다녔을 것이다. 가구가 없이 텅 비어 있는 집은 소리의 진동이 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거울 앞에서 짧은 커트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무스 한 번 살짝 뿌리고 주무신다는 멋쟁이 할머니. 일본에서 오래 살다 남편이 한국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어 학생인 아들 둘과 함께 귀국하여 친정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살게 된 자매님.


 고맙고 반듯한 이웃으로 우리 손주들이 티 없이 크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아들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집 아들들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엄마랑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ᆢ."


 각해 보면 그 집에서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고 놀았던 날들도 숱하게 많다. 아래층의 배려와 이해로 별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지냈던 고마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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