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3
할아버지,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
아이들이 독립해서 들어간 집도 아파트 5층이었다. 살던 집에서 걷어 챙겨 간 방음 매트를 깔고 별일 없이 일 년여를 잘 지내던 중이었다.
어느 날 아랫집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 달 남짓 걸린 공사가 끝나고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바로 층간소음 항의가 시작되었다. 인터폰으로 또는 경비 아저씨를 통해서 항의가 올 때마다 딸은 죄송하다는 말로 고개를 숙이고 아이들을 단속하기에 바빴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대학생인 딸과 중년 부부, 이렇게 세 가족이 이사를 왔는데 그동안 전세 주었던 집을 리모델링해서 자가 입주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거주자가 쉬이 바뀔 희망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기존에 쓰던 매트를 걷어내고 더 두꺼운 신제품으로 바닥 전체를 빈틈없이 메꿨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항의 빈도가 잦아지면서 스트레스 지수는 급상승하였다.
아래층 사람들이 너무 힘들다는 사연을 적어 딸네 집 현관문에 쪽지를 붙여 놓은 날도 있었다. 딸이 아랫집을 찾아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조심시키고 매트도 바꾸어 깔았다는 사정 설명을 드리고는 엉엉 울었다고 했다.
죄송하다는 뜻으로 10Kg짜리 사과 한 박스를 보내 드렸더니 마음만 받겠다면서 한 알만 빼고 나머지는 박스째 도로 돌려보내어서 난감해하기도 했다.
초등 1, 2년생인 우리 손주들 때문에 식탁등이 흔들리고 금방이라도 아이들이 천정을 뚫고 떨어져 내려올 것처럼 불안하다는 대학생 딸의 말도 전해 왔다.
딸과 사위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언제 아래층의 항의 인터폰이 또 올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이 집을 팔고 같은 동네 1층으로 이사 가는 일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인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신경 곤두세우며 힘든 갈등을 겪는 우울한 일상이었다.
이 소식은 사돈댁에도 전해져 시어른 두 분도 걱정이 많아지셨다. 나도 딸의 힘든 마음을 전해 들으며 마음이 답답했다.
사돈댁은 딸네 집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빌라 주택 1층이었다. 마침내 부모님과 집을 바꾸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20여 년 전에 구입하여 세 아이들을 키우고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계속 편하게 살아오신 정든 집이었다. 세 자녀들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도 무척 많아 살림을 줄일 엄두를 내지 못해 중도에 그 계획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태가 너무 심각해지자 결국 두 집을 맞바꾸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쓰시던 커다란 식탁과 김치 냉장고, 옷장들은 그대로 두고 묵은 짐들을 거의 반으로 줄여가면서 두 분은 아파트로 들어가셨다.
손주들은 일층 빌라로 이사를 왔다. 두 집이 같은 날 움직이며 낡은 곳을 수리하고 도배를 하는 등 대공사가 이루어졌다. 경비와 품도 많이 들었다.
제일 큰 문제는 다니던 초등학교로부터 통학 거리가 그만큼 더 멀어진 일이다. 큰 길도 건너고 주택가 좁은 골목마다 쏟아져 나오는 차량들을 잘 피해 다녀야 한다. 혼자서도 갈 수 있었던 학교 길을 등하교 때마다 어른들이 동행했다. 학년이 달라 하교 시간이 다르다 보니 하루에 세 번씩 부모들이 등하교 길을 챙기는 나날이 되었다. 학교 앞 피아노 학원에 교습이 있는 있는 날은 다섯 번씩.
할머니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파트 아래층에서 사돈에게로 또 항의가 왔다. 발걸음 소리가 너무 크다고. 사돈어른이 목소리를 높이셨다.
"일흔 넘은 노인이 집안에서 걸으면 얼마나 세게 걷는다고 그러냐?"
그 이후 별 말이 없다고 한다. 사실 두 분 모두 가벼운 몸매이시다. 그렇게 한마디 호통치셨지만 어쩌다 싱크대에서 냄비 뚜껑이라도 하나 떨어뜨려 큰 소리가 나면 그 순간 두 분이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긴장하신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손주들은 다시 층간소음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일층 빌라에서 신나게 뛰어다닌다.
코로나로 이렇게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계속 그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딸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쉰다.
나도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보며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멀어진 등하교 길을 씩씩하게 오고 간다.
어른들은 무척 번거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