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공원

by 서무아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한 곳은 부산이다. 결혼 후 돌 지난 큰애를 데리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옮겨 왔다. 당시 큰언니가 살고 있었던 관악구 신림동이 자연스럽게 서울의 첫 거주지가 되었다. 뽈뽈거리며 쏘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낸 곳도 아니고 아이까지 딸린 주부로 시작한 서울 생활이다 보니 행동반경은 빤했다. 동네 시장과 버스 정류장까지의 골목길과 세 들어 살던 집 그리고 언니네 집, 이것이 다였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큰 맘먹고 영화 한 편 보러 시내라고 불리는 종로나 남대문 쪽으로 나가 보는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삼청 공원은 뚝 떨어진 어느 상상의 세계에나 속해 있는 듯한 낯선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내 여동생과 나는 자랄 적부터 달라도 너무 달랐다. 꽁한 성격으로 집 안만을 맴도는 나와 달리 동생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막내 남동생, 작은 오빠와 함께 남자애들과 어울려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니며 딱지치기, 구슬 따먹기 등에 재미 붙여 밖으로 밖으로 나돌았다. 목소리도, 체구도 나보다 컸다. 집에는 오빠와 동생들이 바깥 놀이에서 따 온 딱지와 구슬들이 수북했다.


1960년대 당시 어린이들의 놀이에도 군사 문화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일까? 내 가물가물한 기억이 맞다면 가로 2cm 세로 4cm 정도 되는 얇은 마분지 종이 딱지. 그 위에 저급한 인쇄 기술로 계급이 적힌 조악한 군인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딱지를 100장씩 헤아려 노란 고무줄로 탱탱 감아 당시 큰 성냥통이었던 나무상자에 차곡차곡 쌓아 담아서는 신줏단지처럼 방 윗목에 모셔두고 날만 새면 들고나갔다. 어떤 날은 거의 비어서 돌아오고 어떤 날은 가득 채워져 돌아왔다. 속에 각종 바람개비 무늬가 들어 있는 유리구슬도 마찬가지였다. 동글동글 사방으로 굴러 흩어지는 구슬들을 모아 헤아려 보고 또 헤아려 가며 주머니 가득 채워 대문을 드나들었다.


그 외향적 성향은 지금까지도 별반 바뀐 게 없다.


"언니야, 길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와 길을 못 찾아가노?"


몇십 년 장롱 면허 신세인 나와 달리 동생은 온갖 종류의 차로 천국을 휭휭 누빈다. 물론 이런저런 사고도 잦다. 그래도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나는 사고가 한 건도 없다. 운전대를 잡지 않으니까ᆢ.


결혼 때까지 부모 밑을 떠나지 않았던 나와는 달리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갔으니 그 성격에 서울 지리는 완전 꿰고 있다. 집과 학교밖에 몰랐던 나는 한마디로 꽁꽁 막힌 백면서생이라 그냥저냥 평탄한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그에 비해 동생은 진취적이어도 너무 진취적이다 보니 항상 현실을 뛰어넘는 과도한 꿈을 좇는다. 욕심이 앞선다. 그리고 무지개 빛 꿈을 좇아 마구 진도를 뺀다. 결과는 튼실하지 못하다. 실패한 일이 채 마무리도 안 된 상태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인다. 그러다 보니 삶이 평탄치 못하다. 함께했던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신용을 잃게 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늘 맨땅에 박치기하는 동생의 삶이 안타깝다. 젊을 때는 짐으로만 여겨져 그로 인해 입게 되는 경제적 부담과 받게 되는 심적 스트레스로 우울하고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언니야, 내 이 말 안 할라꼬 했는데ᆢ."로 시작하며 울먹이는 동생의 전화 앞에 나는 단 한마디도 대꾸를 못 하고 그 요구들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 누군가 나의 그런 태도를 '그리스도 콤플렉스'라고 명명하면서 그런 요청은 딱 잘라 거절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동생에 대해 막연한 의무감과 죄책감이 있는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 인륜지도에 어긋나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줄 알았다.


그때 동생은 정말 힘든 때였다. 80년, 90년대 증권 시장이 날개를 달던 시절, 증권맨으로 잘 나가던 제부. 자분자분 달변에다 사람 좋아하는 성품이다 보니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 꼭 하나 있었다. 술, 바로 술이었다. '술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대로 술로 인해 건강을 해쳤다. 결국 60을 채 넘기지 못하고 긴 투병의 고통 끝에 이승을 떠났다. 아직 제 밥그릇 못 챙기는 3남매를 두고 ᆢ.


그 얼마 후 동생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소진 상태였고 내적 외적 환경이 모두 파산 직전이었다. 그전까지는 우리 둘의 성향과 행동이 너무 다르고 둘 다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하고 부업하는 각자의 생활에 쫓기다 보니 가끔씩의 전화 통화 외에는 동생과 내가 공유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동생네의 경제사정이 우리 집보다 훨씬 나았다. 동생은 학원을 경영하고 호텔 헬스장을 다니고 아이들은 수영을 배우고 셋 모두 진로를 예체능 쪽을 택했다. 미술, 미술, 야구.


그러나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서 하루를 함께했다. 만나는 곳은 안국역 2번 출구. 아침나절의 지하철 역에는 항상 베이커리의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역 안 가득 번져나고 있었다.


종로구에 살고 있는 동생과 서초구에 살고 있는 나는 등산복 차림으로 안국역에서 만났다. 부지런한 동생은 미리 와서 그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아이쇼핑을 즐기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아둔 날은 구매도 한다. 물론 대금은 내가 치른다. 대기업에서 기증한 짱짱한 새 물건들이 엄청 싼 가격표를 달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제 북악산 기슭 산행을 시작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삼청 공원이었다. 삼청 공원엘 들어서면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한 백 년 뒤로 돌아간 듯한 고요한 느낌을 받았다. 인적 없는 텅 빈 공원. 별로 손이 안 간 듯한 평범한 수종의 나무들이 무성했고 발자국이 거의 없는 땅바닥 흙들은 하얗고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규모는 꽤 커 보였다. 그곳을 후딱 지나 지리에 능한 동생이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걷는다. 고즈넉한 산길이 참 깨끗하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두 시간 정도 걷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다시 도심으로 향한다. 점심 메뉴는 동생이 원하는 대로 정했다. 토속촌 삼계탕 집도 몇 번 들렀다. 그리고는 성균관 대학교 옆, 와룡 공원 밑 단독주택의 지하방인 동생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또 하나의 방앗간이 있다. 동네 슈퍼마켓. 필요한 것 사라고 하면 동생은 좋아라고 이것저것 주워 담는다. 적당히 욕심도 부려 가면서. 나는 말없이 동생의 뒤에서 카드만 꺼내면 된다.


사람 잘 사귀고 말발 좋은 동생은 거의 항상 수학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논술 수업을 해 주었다. 내가 주로 논술 교사로 활동했던 목동에서 네 명씩 팀을 짜서 오던 학생들과는 너무 다른 수준의 학생들이었다. 학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서너 명의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이 들쑥날쑥 와서는 묻는 말에 짧게 답하는 외에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에 맞는 수업을 해야 하니 수업의 질은 뚝 떨어졌다. 당연히 무료 봉사다. 동생이 대신 수업료를 받았는지 어떤지는 지금까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어느덧 시계는 4시. 일찍 어두워지는 겨울 저녁 시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런 시간이 반년 정도 이어졌다. 교회 일로, 바깥 일로 항상 분주했던 동생이 그때는 할 일도 만날 사람도 딱히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후 동생은 파주로 이사를 갔다. 건강도 많이 회복하고 세 명이나 되는 조카들도 많이 자랐지만 지금도 바쁘고 힘들게 사는 것은 여전하다.


그 동생에게 내가 배운 것이 있다. '고맙다'는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특히 형제들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편이다.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형식적인 인사는 입에 달고 살지만 근검절약, 내핍 생활로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조용히 살아온 내 삶은 크게 남의 신세를 진 일도 없이 비교적 평탄한 편에 속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키워 온 교만의 싹이 자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은 '고맙다'는 말을 잘한다. 두 살 위인 언니, 어찌 보면 자라는 과정 내내 경쟁 대상, 질투 대상이었을 수도 있는 고까운 언니에게 울먹이며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고맙다'는 말을 대화 중에 빼지 않고 하는데 나는 그 진정성에 깜짝 놀랐다. 긴 시간, 내가 부담했던 꽤 많은 도움은 크리스천 동생에게는 언니가 아닌 하느님의 선물이었고 명목상 빌려간 돈은


"언니 지는 이 돈 없어도 산다 아이가?"


라는 자신만의 논리로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 되었다.


'고맙다.'는 그 익숙지 않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이리 진정성 있게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 별로 없었다는 걸 바로 알았다. 돌아온 탕자의 겸손한 고백과 어설픈 정의의 잣대로 아버지의 사랑까지 비판하고 불평하는 큰아들의 교만. 동생과 나의 모습이다. 자칫 남보다 더 소원하게 지낼 뻔했던 우리 자매 사이가 이런 도움을 주고받는 계기로 그나마 서로 챙겨주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이로 이어져 가고 있다.

우울증으로 바깥 세계와 담을 쌓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보다 이렇게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내 동생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그나마 고맙다. 차갑고 사무적이고 교조적인 언니를 잘 참아내 준 점도 고맙다.

이젠 나이도 있으니 일을 좀 줄이고 집안과 건강을 잘 살폈으면 하는 나만의 바람을 가져 본다.



2021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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