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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by 서무아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다가오면 본당에서는 보통 54일 간 고3 수험생 어머니들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함께 모여 마음 모아 묵주기도를 바친다. 시험 당일에는 하루 종일 성당에서 피정 시간을 가진다. 결과에 상관없이 시험에 지친 자녀들을 품어 안기 위한 부모교육도 하고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신심도 다지며 전능하신 창조주의 위대한 사랑의 섭리에 내 아이의 미래를 맡기는 간절한 염원으로 고생하는 아이들과 마음을 함께한다. 성지를 찾아가 하루 종일 그곳에서 기도하기도 한다. 나도 세 아이들을 키우며 그런 시간들을 거쳐 왔다.

내가 입시를 치를 때면 불교도이셨던 어머니는 산기도를 다니셨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 때마다 한 번도 빼지 않고 매번 그 일을 반복하셨다. 나이 차이가 많은 큰오빠, 큰언니, 작은언니는 이미 독립하여 가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지만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우리 집안을 꾸려가는 총책임자는 어머니셨다. 늦둥이에 속하는 작은오빠, 나, 동생 둘, 네 명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의 계속되는 학업 뒷바라지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심초사 애태우셨을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순간부터 모두 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해야 했기에 매일 아침 준비해야 할 차비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다가 보태지는 수업료, 등록금, 각종 책값, 준비물 살 돈 등등.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있다가 학교 출발하기 직전 필요한 돈을 이야기하면 미리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야단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미리 말했다간 어머니 걱정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던 뻔한 현실. 그래도 참으로 씩씩하셨던, 1915년 생 수원 백씨 어머니는 항상 입에 달고 자주 되뇌이셨다. "똥 묻은 주우(속곳 바지)를 팔아서라도 공부는 시킨다." 이 말씀은 어린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딸 아들 차별대우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잡화상 가야 상회의 맞은편 시장터 골목에서 텃밭에서 키운 각종 채소들과 손수 만드신 밑반찬들을 내다 파셨다. 많은 가족들의 뒷바라지와 장사로 쉴 틈 없이 힘들고 바빴을 일상인데도 어둠이 깔릴 무렵 장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시면 후다닥 저녁을 챙겨 먹이시고 바로 산으로 향하셨다. 각자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철부지 우리들에게 집안일도 강요하지 않으셨다.



집에서 한참 올라가면 구덕산 줄기 한 자락 끝에 물이 퐁퐁 솟아나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그곳이 어머니의 기도장소였다. 매일 사과 한 알과 성냥통을 챙겨 들고 총총걸음으로 그곳으로 향하셨다. 아마도 49일 기도를 드린 것 같다. 처음에는 혼자 다니시다가 입시가 코 앞에 다가오면 사흘 정도는 나를 앞세우셨다.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섣불리 거절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옹달샘에 도착하면 맨 먼저 그곳을 간단하게 청소부터 하신다. 주섬주섬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걷어내고 차가운 물 밑에 깔려 있는 찌꺼기들을 맨손으로 긁어내어 구정물들을 흘려보내면 퐁퐁 맑은 물이 솟아나는 깨끗한 샘물이 드러난다. 모든 것이 다 얼어붙는 한 겨울인데도 그곳에서만 얼지 않는 옹달샘 물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찾아내신 기도장소다. 바위틈에 숨겨 놓았던 초 두 자루를 꺼내어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 잡아 촛불을 밝히고 그 앞의 조그만 접시 위에 들고 오신 사과 한 알을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소리 내어 기도를 하신다. 나와는 다르게 외향적이고 활달하신 어머니의 성격대로 천지신명님, 산신님, 용왕님, 조상님ᆢ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절대자들의 이름을 다 부르시며 나의 합격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구경꾼이 되어 우두커니 뒤에 서 있는 나에게도 절을 하라 시키신다.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라 시큰둥하게 뒤에 서 있다가 어머니의 강한 채근에 마지못해 절을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삼빡하게 교양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하고 외딴곳이라 아무도 볼 사람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한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어머니는 그 일을 반복하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춥고 어두웠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매일 나에게 그 사과를 건네셨다.



수험 직전 보름날에는 잊지 않고 달빛 아래 바늘구멍에 실을 꿰었다. 수험 당일 입고 갈 옷의 가슴팍에 달린 수험표 뒷부분에 바늘을 꽂아 실을 칭칭 감아 주시고 첫아들을 낳은 집을 수소문해 배냇저고리를 구해 와 윗옷 안 쪽 등판에 기워 주시기도 했다. 나에게만도 세 번씩이나 그런 일을 해 내신 어머니의 그 집중된 헌신을 그때는 너무도 가볍게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무식하고 미신적인 행위라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든든한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사랑의 기운이 가득 실린 징표들이니ᆢ.



은혜라고는 모르고 앞뒤 꽉꽉 막히고 이기적인, 알량한 학교 공부밖에 모르던 어린 내가 어머니로서는 섭섭할 때도, 힘겨울 때도 많았을 텐데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져 주셨다. 아침 등교 시간, 때 맞춰 네 명 몫을 힘들게 준비해 놓으신 도시락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휙 학교로 와 버리면 그 다음날에는 내가 조르던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새 학기 참고서, 예쁜 책가방, 새 운동화 등등. 그런 철없는 나를 꺾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품으시느라 어머니는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드셨을까?



어머니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평온한 환경 속에서 착하고 반듯한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훌쩍 커서 다 성장해 버린 딸, 아들에게서 교조적이고 일 중심적이고 이중 언어를 쓴다고 불평을 듣는 나답게 내가 뜻한 대로 아이들을 주도해 왔고 아이들은 잘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따뜻하고도 별다른 추억은 없지 않나 싶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은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할까?



이 글을 읽고 장녀인 큰언니가 몇 가지 더 보태 주었다.


엄마는 항상 긴 생머리에 쪽을 쪄서 비녀를 꽂고 다니셨다. 시장에서 돌아와 산기도를 올라가기 전에 정성을 들이느라고 찬물에 머리를 감고서는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어두운 산길을 다녀오셨다. 주무시려고 비녀를 빼려면 얼어붙은 비녀가 잘 빠지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신 걸 보면 정말 우리 엄마는 강한 정신력을 가지신 분이 분명하다. 그리고 치성을 드릴 때면 산신령이 엄마 옆에 내려와 같이 있기도 했다는데 큰 개만 한 동물이 꼬리를 바짝 치켜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형체를 산신령이라고 믿으셨다는데 초긍정적인 성격을 지니신 엄마의 확신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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