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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 백직년 모니카.

by 서무아

2013년 봄, 다섯 명의 동창들과 함께 바닷가 마을 통영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향긋한 도다리 쑥국과 봄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과 푸짐하게 구워져 나오는 생선구이의 담백한 맛을 즐기며 하하호호 통영을 누볐다.

친구들 모두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의 열혈팬들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1973년, 그 해에 창간되어 이어령 선생님이 주간을 맡고 계시던 월간지 <문학사상>에 연재되어 나오던 소설 <토지>. 매달 실리는 일정량만을 읽으며 한 달 후에야 만나볼 수 있는 다음 내용을 기다리는 감질맛에 포옥 빠져 있었다. 잠깐 스쳐갈 수밖에 없는 길상과 옥이네의 절제된 사랑까지도 우리들의 여린 감성을 깊게 자극했다. 그것은 유신시대를 지나가고 있던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커다란 문화 선물이었다.


박경리 선생 문학기념관엘 들렀다. 6ㆍ25 전쟁을 통과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 내며 뜨겁게 쏟아낸 문학 작품들이 알차게 전시되어 있었다. 마음에 와 꽂히는 한 구절 한 구절, 선생이 남기신 귀한 글들을 대하며 천천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한 곳에서 발이 딱 멈추어 섰다.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 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30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 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어쩜 이리 내 마음과 똑같을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수시로 밀려오던 회한. 그 새빨갛던 핏빛이 희미한 기억으로 스러지기까지는 거의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내 손에 쥐어 준 쪽지에 쓰인 어설픈 글씨의 주소를 겨우 읽어내어 어렵게 어렵게 어머니를 찾아가는 꿈, 어디선가 어머니가 고생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어렵사리 돈을 준비해 어설프게 어머니를 찾아가는 꿈, 멀리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발견했는데, 분명 어머니인 것 같은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꿈 등, 어머니에 대해 비슷하게 안타까운 꿈들이 반복해서 여러 날 내 꿈의 창을 두드렸다.

그런 다음날이면 집을 나와 안양천변을 걸으며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며울며 내가 전하는 엄마 꿈 이야기에 수화기 너머 언니도 같이 울었다. 그리고 위로해 주었다.

걱정 말라고, 엄마는 좋은 데 가셨고 너한테 미안해서 얼굴을 안 보이시는 거라고 ᆢ.


넉넉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거의 과보호에 가까운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보살핌으로 학교 공부와 학창 생활에 몰입할 수 있었던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책 속에 빠져 사는 백면서생으로 자랐다. '어머니'라는 커다란 우산 아래에서 비교적 온실 속 화초로 자란 편이라 개척 정신이나 독립심 같은 것이 많이 부족했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고개 꼿꼿이 쳐들고 앞만 보며 공부 잘하는 것, 이것뿐이었고 다행히 나는 또 그 일이 비교적 적성에 맞았다. 장남과 막내가 스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운 7남매 중 다섯째인 나는 많은 갈등이나 괴로움에 부대끼기도 했지만 별 좌절 없이 원했던 중,고,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덕분이었다.


1977년 3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학교 국어 2급 정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바로 그해 9월에는 결혼으로 어머니를 떠났다. 2년 후에는 어머니가 계셨고 내가 자랐던 부산에서 천리 길 떨어진 서울로 이사를 했다. 직장을 옮긴 남편을 따라 부산 영도 신혼 살림살이와 교편생활을 정리하고 갓 돌이 지난 큰애를 데리고 서울로 온 것이다.


이삿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두 분이 다 올라오셨다.

부산 신혼집 전세금 90만 원 중 남편 회사 융자금이었던 50만 원 부채를 갚고 2년 동안 장남으로서의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둘이 알뜰살뜰 모아 200만 원이 된 우리의 총 재산. 그 돈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었던 집은 단독 집 반지하 두 칸짜리 방이었다.

하늘 아래 당신에게는 최고인 아들이 남의 집 지하방에 세든다는 것에 자존심 상한 시어머니는 그 집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주인집 젊은 아주머니에게 아들 자랑하느라 바쁘셨다.

당시 쉰둘이셨던 시어머니보다 열한 살 많으신 예순세 살 친정어머니는 휑하니 낯선 동네의 재래시장을 찾아가 나무궤짝으로 된 사과상자 하나를 구해 오셨다. 반지하 방의 하나뿐인 입구, 길고 좁은 부엌 시멘트 계단 위, 1층 주인집 정원에 키 낮은 누운 향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잔디밭 사이, 좁은 통로에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이미 이삿짐 나르는 인부들의 험한 발자국에 짓밟혀 상해 있었다. 어머니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 나뭇가지들을 부직부직 꺾어 버리시고는 그곳 담벼락에다 기대어 시장에서 주워 온 나무 널판 사과상자를 턱하니 자리 잡아 놓으셨다. 그것이 우리 집 신발장이 되었다.

주인집 비싼 향나무 정원수보다 내 딸 나무 사과짝 신발장이 더 소중했던 어머니.


50세에 아버지와 사별하신 어머니는 8살, 10살, 12살 올망졸망한 어린 자식부터 16살, 20살, 26살, 31살 머리 다 큰 장성한 자녀까지 일곱 아들딸들을 데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거칠고 험난한 세월을 꿋꿋한 기상으로 헤쳐 나오셨다. 사연 많은 긴 세월을 살아오시는 동안 굽이굽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내셨을까? 학업과 직장과 세 아이의 육아와 시골 장남인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바빴고 내성적이며 말솜씨도 없었던 나는 마음만큼 어머니께 알뜰살뜰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나에 대한 짝사랑은 끊인 적이 없었다. 물심양면의 학창생활 뒷바라지는 물론이고 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는 언제나 만사를 제치고 바람같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나의 출산 소식이 전해지면 번개처럼 모든 일을 다 내팽개치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시던 어머니.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봄만 되면 올라오셨다. 겨울 동안 꺼내 덮었던 두꺼운 이불 호청들을 다 뜯어내어 손으로 주물러 빨고 헹구어 말려서는 또 빳빳하게 풀 먹여서 밟아 말려 뚝딱뚝딱 새 이부자리로 꿰매 만들어 주셨다. 무슨 살림을 이렇게 사냐며 어머니 마음 내키는 대로 부엌살림 대청소도 해 놓으셨다.

어머니가 가시고 나면 나는 또 내 마음대로 다 꺼내 늘어놓고 살았다. 별로 섬세하진 못하셨고 후딱후딱 어머니 생각대로 해치우시는 활달한 성격이셨다.


'시계불알'이라고 별명 붙여 주신 사위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퇴근해서 까칠하게 말 수 적은 게 어려워서 낯선 타지에서 금방 사귄 옆집 아주머니에게로 밤마실 가곤 하시던 어머니. 그렇게 대엿새 머무시다 또다시 천리 먼 길 기차를 타고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 없는 부산 빈 집으로 홀로 돌아가시곤 하셨다.


나는 역까지 바래다 드리기나 했을까? 기억에 없다. 세탁기가 없었던 시절, 어머니가 연립주택 옥상에, 아파트 베란다에 손빨래해서 널어 놓으셨던 새하얀 옥양목 이부자리 호청들, 산바라지 하시느라 빨아 널었던 기저귀랑 아가 옷들이 강한 봄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이며 나부끼던 장면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진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어린 시절, 얌전하고 조용했던 내가 동네에서 골목 친구들이랑 어쩌다 말다툼이라도 하게 되면 득달같이 그 집으로 달려가 그 애를 꾸짖으며 나의 억울함을 해소시키고 오시던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적이거나 교육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어머니는 온몸으로 세상 바람을 막아주시는 커다란 몸집의 보호자셨고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넓고 큰 그늘막이셨다. 철없고 내성적이고 이기적이었던 나는 그런 활달하신 어머니를 못마땅해했던 때도 많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내 편이셨던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15년이 넘었다.


200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당시 86세이셨던 어머니는 다리가 많이 좋지 않으셨다. 워낙 험하게 많이 쓰셨기 때문이다. 씩씩한 어머님은 별 내색 없이 규칙적인 진통제 복용으로 통증을 다스리며 일상생활 거동을 겨우 하시는 정도였지만 세 아들들의 형편이 좋지 않아 파주에 있는 막내 여동생네 집에서 기거하고 계셨다.

중학생, 대학생, 직장인인 세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 논술 수업 등으로 빡빡했던 나는 어머니를 거의 찾아뵙지 못했다. 오랜만에 날을 잡아 남편과 함께 어머니 점심 대접을 해 드리려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목동 우리 집에서 동생네까지 30여 분, 자동차로 달려 도착했다. 그런데 모든 문이 다 열려 있고 집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동생에게 연락해 보니 병원 응급실이라고 했다. 우리와 외출할 준비를 하시느라 목욕탕에서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입었던 속옷은 빨아서 꼭 짜서 세면기 위에 단정히 올려놓은 채로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119로 급히 경희대 한방병원으로 갔지만 의약분업 파업 중이라 고려대 병원으로 갔는데 그곳에도 자리가 없어서 막내 남동생 사무실에서 가까운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막막한 기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의료비 걱정이었다. 오빠도, 언니도 엄마 병원비를 척척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책임자는 나다. 월급쟁이 생활로 아이들 셋 교육시키고 시댁 보살피고 친정 도우며 살얼음 걷듯 살아온 세월 뒤끝이라 내가 느끼는 경제적 부담감은 엄청 크고도 무거웠다. 오빠와 언니들이 있으니 내놓고 남편과 의논할 수도 없는 상황. 담담한 심정으로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님은 중환자실로 옮겨지셨고 담당 의사 말로는 24시간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뇌혈관이 터졌는데 그것이 숨골을 압박하여 심장기능과 호흡기능이 나빠지고 모든 내장 기관들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허락된 면회 시간에 차례로 들어가 어머니를 뵈었다. 내 차례가 된 순간 나는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께 어떤 위로도, 사랑도, 감사도 전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그냥 손만 잡고 있었다.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감정보다 의무에 더 짓눌리는 인정머리 없는 내 성격의 한 단면이다. 지금도 후회되는 장면이다. 나의 이런 마음을 예측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죄책감으로 우울해질 때면 어머니가 평소에 여러 번 거듭 들려주셨던 위로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는다.


"니는 내 죽으면 울지 마라."

"미안타."

"고맙다."

"니가 내한테 해 준 것들, 잡책(공책)에 다 적어 놨다."


아마도 마음의 공책이었을 것이다. 내 나름의 책임감과 애틋함으로 작은 정성을 담아 조금이라도 어머니께 힘이 되어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기쁘고 보람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아주 크게 받아들이시고 참 많이 고마워하셨다.


부산에서 연락을 받은 작은오빠 부부가 도착하고 한 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으로 큰오빠와 큰올케언니가 오셨다. 두 분이 중환자실에 계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는 순간, 눈을 감고 계시던 어머니 손에 힘이 주어지고 심전도의 그래프가 급격히 움직였다. 잠시 후 그래프의 파동은 그대로 사그라들면서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예상보다 꽤 늦게 큰오빠네 부부가 도착하실 때까지 어머니는 죽음과 싸우며 버티시다가 장남인 큰오빠를 만나 본 순간 숨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병원에 오신 지 딱 하루, 24시간 만이었다.


오매불망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어머니가 사랑하셨던 첫아들 장남, 우리 큰오빠. 착하고 착했던 집안의 기둥, 힘들고 힘들었던 7남매의 맏이. 내가 큰오빠를 공경하는 이유다. 그때 이미 오빠도 60을 훨씬 넘어 삶에 지친 노년에 이르러 계셨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의 손길 한 번 잡으시고는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삼남 사녀 우리 칠 형제. 너무나 다양하고 개성 강한 성격들. 큰 분란 없이, 서로에 대한 원망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무사히 잘 치렀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우리 네 딸끼리 서로 약속했다. 결코 통곡하며 소리 내어 울지 않기로 했다. 딸들의 슬픔과 한이 담긴 울음은 40년 가까운 시집살이를 해 오신 큰올케언니의 불편한 심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쉽지 않았다. 입관과 화장과 유골단지를 땅에 묻는 절차는 너무 가슴 아팠다. 그렇지만 서로 보이지 않게 검은 상복 뒤로 손을 꼭 잡고 도닥여 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슬픔을 꾹꾹 눌러가며 흐느꼈다.

관이 화장장 입구로 들어가서 한 줌의 뼈로 변해 나오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모두들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고 우리 네 자매만 남아 그 자리를 지켰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삶을 접는 마지막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한다는 마음이었다.


20여 년 간 남편이 몸 담아오던 대기업에서 전무직을 끝으로 고문 임명을 받은 첫해인데다 결혼 이후 처음 겪는 경조사라 남편의 회사에서 상당한 액수의 조의금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 막내 남동생 일이 조금 풀리고 있던 때였던지라 어머님 장례 경비는 넉넉했다. 가톨릭 세례는 받으셨지만 긴 세월 불교에 몸 담아 오셨고 큰언니랑 작은오빠가 불교도인지라 경북 영천 만불사에 부도탑으로 모셨다. 형제들 어느 누구의 경제적 부담 하나 없이 서울 삼성 병원 특실 영안실에서 3일간의 장례의식을 치렀다. 이틀째에는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승리하는 기적 같은 쾌거도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2년 전쯤 일주일 정도 입원하셨던 경희대 한방병원에서 모니카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으셨다.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일곱 자식을 길러내신 어머님이 병원 신세를 진 유일한 시간이다. 평생 몇 번의 치과와 한방 침 치료 이외에 병원을 드나드신 적이 없었다. 성당 미사에는 잘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큰 활자로 인쇄하여 코팅해 드린 주기도문, 성모송, 영광송을 소리 내어 자주 읽으셨다고 한다. '엄마가 누구랑 무슨 이야기 하고 계시나?' 하고 동생이 방문을 열어 보면 그 기도문들을 읽고 계셨다고 한다.


음력으로 1917년 8월 그믐날 태어나셔서 2002년 5월 7일 돌아가시기까지 85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누구보다도 강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엄청난 희생과 헌신과 나눔의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

이 땅에서 겪으셨던 모든 근심, 걱정, 설움, 고통 다 벗어 버리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넉넉한 천상 낙원의 평화를 누리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어머니를 맡겨드립니다.


엄마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내 엄마♡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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