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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 서정식.

by 서무아

음력으로 1966년 3월 7일 (57세, 친정아버님) 2002년 5월 7일 (86세, 친정어머님) 2002년 10월 16일 (80세, 시아버님) 2015년 4월 6일 (88세, 시어머님) 이렇게 친정, 시댁 양가 부모님 네 분이 다 세상을 떠나셨다. 이 순서대로 네 분의 임종과 삶을 기억해 볼까 한다.

제일 처음은 친정아버님 서정식.


1909년, 아들만 다섯이었고 농사가 주업이었던 달성 서 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아버님 함자는 서영필, 어머님은 동래 정 씨 정숙이.


24세인 1932년, 16세인 어머니와 결혼해서 당시 아버지의 사촌 형님이 운영하시던 사업장에 일자리를 얻어 그곳에서 일을 하셨다. 부산역 앞 초량동에서 그 당시 지금의 택시에 해당되는, 소와 말이 끄는 마차를 여러 대 갖추어 놓고 교통수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는, 소위 일종의 운수사업이었다고 한다. 큰언니가 들려주는 말에 의하면 주로 기생들이 술집 출입을 위해 그 마차들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여러 마리의 소와 말,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마부 등으로 집안이 북적대니 일거리도 많아 어머니도 함께 그곳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나보다 열아홉 살 많은 큰오빠와 열네 살 많은 큰언니가 태어난 후 아버지의 사촌 형님이 돌아가시자 두 분은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와 본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장만하셨다. 윗동네, 상리, 가야동 575번지. 그곳에서 작은 언니가 태어났다. 살림을 더 늘려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동 403번지로 이사를 했다. 작은오빠, 나, 여동생, 남동생이 태어난 이 집에 자리 잡으시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사셨다. 나도 고3이었던 열여덟 살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200여 평의 넓고 반듯하고 햇볕 좋은 남향 택지였다. 넓고 잘 가꾸어진 텃밭과 철 따라 예쁜 꽃들이 만발하는 꽃밭이 있었다. 마루 끝에 서면 멀리 남쪽 하늘 끝자락에 구덕산 큰 산봉우리가 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논에서 농사도 지으면서 부산 염색에 취직하여 보일러 기사 일을 하셨다. 꼼꼼하고 치밀하신 아버지는 기술이 좋으셨다. 그런데 50대 초반 어느 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귀가하여 주무시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다 토해 내시고 수족에 마비가 와 버렸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위시하여 큰오빠, 큰언니, 온 식구들의 지극한 간호를 받으며 한약을 드시고 침을 맞고 하여 다소 건강이 호전되어 회사 측의 요청으로 다시 근무를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병이 재발하여 거동이 불편해진 후로는 주로 집 안에 머무시는 일이 많았다. 집에서 키우는 닭이랑 토끼 먹이 등을 챙기시고 집안의 텃밭을 돌보고 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전 얼마 동안은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셨다. 아버지의 자릿 요가 깔려 있던 안방의 머리맡, 미닫이 방문 창호지 아래쪽에 아버지가 밖을 내다보실 수 있도록 손바닥만 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와 여덟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어머니는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건강하고 모성애가 뛰어나신 분이라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배냇 돼지 새끼까지 구해 먹이셨다고 한다. 20대였던 큰오빠, 큰언니가 이미 경제 활동을 하고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부지런한 어머니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셨다. 연탄도 없었고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난방을 하던 시절, 벌목이 금지된 앞산으로 나무를 구하러 가는 것도 어머님 몫이었고 돈 벌거나 공부하는 일곱 남매의 먹을거리, 입을 거리 마련이랑 취사, 청소, 빨래, 텃밭 농사와 채소 다듬어 내다 팔기, 모두 어머니 일이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어머니는 그 강한 노동을 척척 다해 내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집을 오신 큰올케 언니도 큰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의 장녀로 자라 건강하고 모든 일을 다 잘하셨다.



투병 생활이 일 년, 이 년 길어지면서 내성적이고 치밀하고 꼼꼼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외향적이고 사람 좋아하고 활달하신 어머니를 통제하고 간섭하기 시작하셨다. 억울하신 어머니도 결코 참지 않고 바로바로 응대하며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오지랖 넓게 내 일처럼 온 동네 일에 나서시는 어머니와 병으로 자리보전을 하게 된 아버지가 함께했던 마지막 2,3년의 세월은 참 힘든 시간이었다. 병이 깊어갈수록 아버지의 노여움도 깊어지고 부당한 통제는 결국은 의처증으로 이어졌다. 거기다가 어린 우리들은 날이면 날마다 뭔가 말썽들을 피워댔으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는 시끄러운 일상이었다.



당시 경찰에 몸 담고 계셨던 큰오빠가 어느 날 퇴근하면서 커다란 액자 하나를 사 오셨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百忍]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 번을 참기. 그것을 안방 문 문턱 바로 위 마루청에다 눈에 띄게 걸어 두었지만 그 액자의 효과는 전혀 없었던 듯하다. [百忍]. 삼남 사녀, 칠 남매의 장남인 큰오빠의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담겼던 그 액자를 생각하면 올해 82세이신 큰오빠에게 좀 더 잘해 드려야겠다는 애틋한 마음이 생긴다.



1966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기신 조그만 나무 상자 금고 안에는 약간의 현금과 매일매일 꼼꼼히 기록하신 가계부 공책이 들어 있었다. 혼자 심심했던 어느 날, 그 가계부 공책을 꺼내 넘겨 보았던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딱 하나의 항목, <아아 우유 ○○원>. 그 당시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 남동생이 갓난쟁이 아가로 우유를 먹었던 때의 기록인 모양이다. 나이 50에 본 막내아들을 특히 이뻐하셨다는데ᆢ. 임종을 지킨 큰며느리에게도 특별히 어린 막내를 부탁하셨다고 한다. 1년 동안 어머니는 마루 한 모퉁이에 나무로 된 높은 제사상, 빈소를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촛불 밝히고 향 피우고 뚜껑 있는 놋그릇에 따뜻한 밥을 담아 숟가락을 꽂아서 올려드렸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엄마와 온 동네가 시끄럽게 싸우던, 끔찍하게 싫었던 장면과 아버지의 내면을 이해해 드려야 하는 그 가계부 기록 공책이 함께 떠오른다. 나보다 14년이나 더 긴 시간 아버지와 함께했던 큰언니는 아버지가 어느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 빚을 진 적이 없고 그 당시에 남자들이 흔히 하던 노름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장모이신 외할머니가 막내딸인 어머니를 보러 종종 오셨다는데 살갑게 아주 잘 대해 주셨다고 들려주었다.



돌아가신 부모님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우리 후손들의 끊기지 않는 우애와 행복일 것이다.


아버지, 일찍 눈을 감으셨기에 그 소망이 더욱 간절하셨겠죠. 저희들 모두 건강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면 힘든 대로, 편하면 편한 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누구 한 명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후회 없이 사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상 낙원에서 영원 복락 누리소서~~!!♡♡



[부록]


이 글을 형제 카톡방에 올렸더니 보내온 댓글들입니다



작은오빠


아버지는 지금 범일역, 즉 교통부에서 신암으로 오면 철도 공작창으로 가는 길에 기찻길 건널목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부산 염색에서 보일러 기사를 하셨다. 어느 날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셔서 아침에 주무시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다 토해내시고 그 뒤로 중풍이 온 거다. 병이 들기 전에는 우리들한테 잘하셨는데 몸이 안 좋으니 역정이 나신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동생


나도 아버지 돌아가신 날, 민아(막내 남동생)하고 학교 가라 해서 학교에 갔다. 우리 반에 가야 여관 집 작은집 아이가 있었는데 나보고 "할배 꽥!, 할배 꽥!" 하고 놀리니까 선생님이 아시고 집에 가라 하셨다. 집에 오니까 막 상여가 큰 길가로 나가고 있었다. 작은오빠 상여복 입은 모습이 오늘 밤 유난히 기억나면서 가슴 짠한 아픈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는 상여를 보내고 대문 안에 있는 넓적한 바위에 앉아서 오열하고 계셨다. 큰오빠 식구들이 분가해서 영도로 이사 갔을 때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똑같이 우는 모습을 봤다. 우리 엄마한테 큰오빠는 하늘이었지... (사실 엄마에게는 큰오빠뿐만 아니라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아래로 우리 넷, 모두가 하늘이었다.)



막내 남동생


나는 기억나는 게 없는데 국민학교 입학도 안 했을 때, 눈 다치고 하기 전이니까 여섯 살쯤 된 것 같다. 그때 누워 계시면서 일 원 짜리 종이돈을 베개 밑에서 꺼내 주시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 동네에 김선생네라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 중에 한 놈이 나보다 한 살 많고 덩치도 컸다. 아버지 장례식 날에 나는 일 학년이라 학교에 갔는데 그놈이 교실 밑 언덕배기에서 나를 보고 "절마(저 놈) 저거 미쳤는갑다. 저거 아부지 죽었는데 학교 왔다."하고 놀렸다. 그때 나는 힘도 없고 기가 죽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서면에서 그놈을 만났는데 중앙고등학교 껄렁거리는 놈들하고 나한테 까불거리기에 '잘 걸맀다.' 싶어서 얼반 직이 뿟고 (거의 죽여 버렸고) 그 새끼 반죽음당했다. 그 담날 학교로 연락 와가꼬 친구들 세 명하고 3주 간 정학당하고 ㅍ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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