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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파먹기

by 서무아

수술과 회복을 위한 2주간의 입원을 사흘 앞두고 있다. 한동안 집은 비어 있을 것이다. 지난주부터 장보기를 멈추고 냉장고 안의 음식들을 열심히 비우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이 비워야 한다.


냉장고 냉동고를 찬찬히 정리하다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보내 주신 사랑과 기억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친구 친척 지인들이 귀한 음식들과 과분한 격려금 등을 통해 따뜻한 마음들을 전해 왔다.


마산 사는 큰시누는 싱싱한 조갯살과 전복을 포함한 해산물을 한가득 보냈다. 부산 사는 작은시누는 을숙도를 찾아가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이제 막 쏘옥쏘옥 얼굴 내미는 어린 쑥들을 며칠에 걸쳐 쪼그리고 앉아 캐어서는 깨끗이 다듬어 보내 주었다. 삶아서 납작하니 눌러 냉동 손질 보관한 쑥 뭉치와 말랑말랑 맛있는 쑥떡은 서울까지 직접 들고 왔다. 오동통 비싼 바닷장어도. 시동생은 유명한 설렁탕집 쇠고기 사골 국물과 살코기 건더기를 두 차례나 보내 줬다. 그리고 한결같이 강조해서 말한다.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요리 실력이 시원찮은 나지만 거의 다섯 달 동안 세 끼 집밥을 부지런히 해 내었다. 아이들은 엄마 가사노동 시간이 너무 길다며 외식이나 주문 배달을 강추했지만 코로나를 빌미삼아 집밥 고수가 이어졌다. 바쁘기 그지없는 여동생도 파주에서 왕복 다섯 시간을 달려 이것저것 반찬들을 싣고 세 번이나 다녀갔다. 아파트 위층 교우 동생은 소식을 알게 된 첫 일주일 간 거의 매일 반찬을 해다 날랐다.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형님 저예요."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면 키 큰 교우 동생이 따끈따끈 방금 만든 반찬들을 들고 서 있다. 형제님은 등산길에 단골 해장국집엘 들러 깊고 담백한 맛을 내는 선지피 국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배달해 오기도 했다.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불러내어 같이 산책하며 위로와 격려를 끊이지 않았다. 작년 겨울, 2년 반의 타지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랬다. 이사 당일 피크닉 나무 바구니에 담아 온 밥상은 진심 고맙고 따뜻했다. 두 끼나 맛있게 잘 먹었다. 지금도 심심찮게 적잖은 먹거리가 오간다. 신혼 초부터 시어머니를 모시고 3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교우 동생도 있다. 커다란 장바구니에 갖가지 반찬들을 담아 마을버스를 타고 음식 배달을 온다. 오이소배기, 견과 멸치 볶음, 물김치, 깎두기, 약밥 등등. 긴 세월 어른 모시고 산 살림 경력이 맛깔스런 솜씨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친구들도 고맙다. 먹어 본 중 가장 맛있다며 보내 준 쇠고기 스테이크 팩, 적당히 간까지 배인 반 건조 가자미, 깨끗이 손질된 통영산 바닷 장어, 코스트코에서 사 왔다는 덩어리 쇠고기, 농장 직송 고급 블루베리, 버섯, 단호박, 심지어 수박, 복숭아까지. 고성 형님은 엄청난 양의 유기농 마늘과 정성 들여 깐 햇 완두콩을 비롯하여 봉지 봉지 챙겨 담은 잡곡과 갖가지 야채들을 커다란 우체국 박스로 세 번이나 보내 주셨다. 과천 사는 친구는 재래시장 단골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올망졸망 텃밭 유기농 먹거리를 우리 아파트 관리실에 맡겨 놓고 번개같이 도망가 버린다. 어제도 그랬다. 관리실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바로 연락하니 걸어가고 있는 숨소리인데도 이미 버스를 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갈한 호박잎과 맵지 않은 풋고추, 금방 딴 듯한 울긋불긋 울타리콩, 조막만 한 연둣빛 여린 조선호박, 하우스 재배와는 다른 모양과 색깔의 새빨간 토마토. 지은 이와 배달한 이의 정성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벌써 세 번째다.


청천벽력 암을 진단받고 가족끼리 한 차례 회오리에 휘말린 충격을 정리해 가며 치료 계획을 가닥 잡고 나니 이 소식을 누구에게, 어느 선까지, 어떻게 전해야 하나? 하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다가왔다. 평소에 너무나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기 관리에 자타의 모범이 되어 왔던 남편인지라 모두의 충격이 너무 클 것이다. 아무에게나 쉽게 알리기에는 환자 본인이나 우리 가족들이 느끼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고심 끝에 일단 시댁과 친정의 형제들에게는 알리기로 했다. 전하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소식이었지만 또 알리지 않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쏟아져 나오는 반응들이 참으로 격하고 비통했다. 마치 부음을 들은 듯한 경악과 슬픔이었다. 한 명 한 명 엄청 자제하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유념했겠지만 그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은 참으로 미안하고도 힘들었다. 그 기간은 좀 길었다. 친지들이 너무 가슴 아파했다. 코로나로 방문도 조심스러우니 더 걱정인 것 같았다. 평소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화상 통화를 시도했다. 얼굴을 보니 좀 낫다고들 하며 한결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큰애도 정작 아빠 얼굴을 보고 나면 훨씬 걱정이 덜 된다고 했다. 아들은 매일 저녁 집에 들르고 가까이 사는 둘째네는 손주들도 돌볼 겸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가 갔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관련 책들이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걸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이제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평생 관리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병이라는 정의가 큰 위로가 되었다. 눈부신 의술의 발달 덕분이라고 한다.


소식을 알게 된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기도해 주시고 챙겨 주시며 격려해 주신다. 다행히 몸과 마음 모두 힘들고 고통스러울 텐데도 회복을 위해 운동과 식사 섭취, 처방 치료 과정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환자의 투병 의지도 확고하다. 평생 올곧게 바른 생활을 해 온 모범생 기질이 여기서도 발휘된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가 감사하다고 안도의 숨들을 내쉰다. 정말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내일, 모레가 지나고 글피인 토요일 오후엔 입원을 한다. 월요일엔 8시간 예정인 수술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은 이발도 하고 필요한 관공서 일도 보고 관련 책도 읽으며 차분히 입원 준비를 한다.


수요일인 오늘은 아들이 퇴근 후 와서 자고 가겠다고 하기에 어제는 또 한 상자 가득 과일 장을 보아 왔다. 싱싱한 사과, 참외, 포도, 바나나, 아보카도까지. 금요일 오전에는 딸들이 함께할 예정이다. 코로나가 또다시 3차 확산 기미를 보인다고 떠들썩하니 더욱 조심스러운 나날이다.


2021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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