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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ul 19. 2022

지켜보는 마음

   애썼다, 장하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카톡방 하나에 불이 켜졌다. 아들의 중학교 학부모 모임 방이다. 중1 때 한 반이었던 인연으로 맺어진 여덟 명 엄마들이 그 방의 구성원들이다. 그러고 보니 어언 20년이 넘는 오래된 인연이다. 40대의 젊은 엄마들은 활발하게 학급 운영에 참여했고 서로의 친목도 다졌다. 정작 아이들끼리는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엄마들은 졸업 후에도 수시로 모여 안부를 나누었.

누군가 주동이 되어 중국의 무릉도원, 장가계 원가계 해외여행도 하고 육로로 북한의 금강산 여행도 다녀왔다. 그 시절 사진 속의 우리들은 한결같이 풋풋하니 젊고 예쁘다. 나름대로의 매력이 은은히 묻어난다.


 오늘 거의 6개월 만에 한 엄마가 반가운 소식을 올렸다. 아들이 Creek&River Tokyo Headquarters에 취업하여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잘하고 있어서 엄마로서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간단하게 아들의 근황을 알렸다.


 88년 용띠로 태어나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된 아들의 지나간 시간들이 쭈욱 스쳐 지나갔다. 시골 할아버지 댁 외양간에 묶여 있는 커다란 황소의 발굽을 보고 소가 구두를 신었다고 신기해하며 방긋방긋 웃던 서너 살 때 모습, 조금 더 자라서는 인어공주 동화책을 읽고 다른 동화책에서는 모두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데 힘도 없는 공주가 어떻게 왕자를 구할 수 있냐고 궁금해하던 모습, 삐뚤빼뚤 잘라낸 갱지 위에 더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를 지키는 용감한 ㅇㅇㅇ'라고 적어 잠들기 전 내 베개 위에 올려놓았던 유치원 시절.


 고마웠던 일, 미안했던 일, 힘들었던 일, 자랑스러웠던 일들이 지나간 시간들 속에 가득하다.

 엄마로서 학원 라이딩이나 과외 주선 같은 일들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스스로 외고를 선택했고 지난대학 입시 장벽 앞에서 그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아들의 수험생 시절은 정부의 의학전문대학 밀어붙이기 정책으로 입학정원의 절반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의전생들에게 할당되고 그만큼 고3  재학생들의 의대 진학문이 좁아진 때였다.

 아들은 다행히 서울에 있는 의대에 진학했으나 많은 다른 친구들이 억울하게 지방으로 밀려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충분히 자격이 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입시제도의 부당한 희생자로 간주되었다.


 의대 예과 2년 과정이 끝나고 본과 4년 과정에 들어서자 학업 스트레스는 완전 급물살을 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쪽지시험. 엄청난 학습량을 익히고 외우고 평가당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첫 중간고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어느 날, 핼쑥한 얼굴로 아들이 말을 걸어왔다.

 "엄마, 머릿속이 하얘요. 밤에 잠을 한 숨도 잘 수가 없어요."

 나는 말 그대로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은 예민한 편인 아들에 비해 많이 둔감한 편인 나도 그 순간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러 과목의 시험이 진행 중이었고 아들은 24시간 열려 있는 대학 도서관에서 거의 날을 밝히고 있는 중이었다. 한 과목 시험이 끝나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채점 결과가 바로 핸드폰으로 날아오는데 전체 인원에서 몇 번째라는 등수까지 표기된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쭈욱 늘어서 있는 수십 개의 현미경 앞을 줄을 지어 몇 초씩 짧게 스쳐 지나가며 그 안에 장착되어 있는 인체 표본들의 정확한 명칭을 재빨리 적어내야 하는 해부학 시험.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이 팽팽하게 진행되었던 시험을 끝내고 다음 과목 시험을 준비하는 중 해부학 시험 평가 결과가 날아왔다. 예상 밖으로 저조한 숫자를 본 그 순간, 도저히  이상은 아무것도 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안타까움을 넘어 위기감까지 느껴졌지만 나로서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의료의 도움을 받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정신과에 한번 가보자."

탈진한 아들은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당일 진료가 이루어졌다.


 아들과 담당 전문의 교수님이 마주 앉았고 나는 보호자로서 그 뒤에 자리 잡았다. 긴장한 아들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교수님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셨다.

 다 듣고 난 선배 교수님께서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시며 스무 살짜리 어린 후배에게 몇 가지 도움말을 주셨다. 나는 뒤에서 메모를 했다. 그 말씀이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하다.


 첫째, 내가 힘들면 다른 동료들도 모두 힘들다는 것을 명심해라.

 둘째,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나도 학창 시절 1년 유급을 했는데 그때 일본으로 무전여행을 떠났던 일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유급을 했는데도 이렇게 교수가 되어 있지 않느냐?

 셋째,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묻어간다고 생각해라. 졸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라.


 지금도 간혹 아들과 산책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 그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선생님은 덧붙여 수면 유도제도 처방해 주셨다.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상위 성적만 유지해 오다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숫자의 등수를 보는 순간 극도의 스트레스에 휘말린 것이다.


 본과의 어렵고 힘든 학과 공부와 실습 기간 4년을 수료하고 의사 자격 국가고시를 치렀다. 그 이후 5년간 6개월씩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 병원 저 병원을 거치며 부설 기숙사에서 밤잠을 설치는 수련기간 이어졌다.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처방받아온 수면 유도제를 책꽂이 한 에다 올려놓고 한 번도 복용하지는 않았지만 힘들 때마다 쳐다보며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11년간의 의학공부 후 어려운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고 곧바로 입대하여 꼬박 3년, 36개월 간의 군 복무기간을 거쳤다. 일반 병사들보다 1년 이상 긴,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간이다. 과거에는 의대생의 8,90프로가 남학생이었던 데 비해 요즘은 여학생과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다 보니 남학생 의대생 숫자의 감소로 군 복무기간을 줄일 수가 없다고 한다.


 성실하게 잘 해내었고 이제 다시 일선 의사로서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가 될지 모르는 펠로우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 뒤로 또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그때 가 보아야 알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대 졸업생이라면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서 깊이 고뇌하는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는 구별되는 사람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의 멀고 힘든 길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걸어가리라 믿을 뿐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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