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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0. 2022

컴맹 할매의 하루

  감사합니다 ♡

매월 둘째 주 화요일은 여고 동기동창 모임이 있는 날이다.  운영진에서 고심하여 하고 예약한 식당에 모여 함께 점심 식사를 나누고 삼삼오오 다시 근처 카페로 옮겨 오붓하게 정겨운 시간들을 보낸다. 코로나로 2년여의 공백이 있었지만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9월 13일 화요일, 오늘도 그런 날이다. 스물여섯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저녁 외출 약속이 있는 나는 점심 동창모임을 건너뛰었다. 두 시경 전화가 왔다. 오늘 참석한 친구 몇이 우리 집 근처로 나를 보러 다는 것이다.

급히 만날 장소를 정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카페, 이디야.

 

승용차로 세 명의 친구들이 도착했다. 문제는 주차다. 코로나 이후 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하루 전 방문 예약을 한 사람에 한해 주차가 허용된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후문 주차장 앞 조그만 공터에 두 대의 차가 서 있다. 우리도 한 대의 여유는 있어 보이는 그 공간을 한번 이용해 볼까 했지만 주차금지라는 입간판이 코앞에서 눈을 맞추고 바로 머리 위에서는 CCTV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언젠가 바로 앞에 있는 학술원, 예술원의 인적없이 평화롭고 넉넉한 마당, 여유 있는 주차공간에 주차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미처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불쑥 나타난 젊은 경비원의 서슬퍼런 경고에 바로 차를 돌려 나온 적도 있다.

그때도 이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을 차 속에 남겨두고 일단 진입로 입구에 있는 안내소를 방문했다. 거의 무인 시스템이라 텅 비어 있는 편인데 오늘은 다행히 두 명의 직원이 있었다. 반가웠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래도 예약이 안 되어 있으면 주차를 할 수 없다고 다. 난감해하는 나를 보더니 핸드폰으로 당일 예약 신청을 한번 해 보자고 제의해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직원이 내 핸드폰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회원 가입은 되어 있었고 에버노트 앱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저장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도와 준 덕분이다.

홈페이지 운운에 벌써 쫄아드는 나는 버벅거리며 적극 협조했고 여직원은 주도적으로 척척 일을 진행시켰다. 당일 예약이 이루어졌다. 차량 번호를 입력하기 위해 그녀는 직접 안내소에서 나와 친구의 차 앞까지 가기도 했다.


예약 절차를 끝내자마자 바로 차를 움직여 안내소 입구의 차단 막대 앞으로 향했다. 아직 입력이 제대로 안 된 탓인지 차단 막대가 꼼짝 않는다. 주차허용 차량번호가 아직 컴퓨터 화면에 뜨지 않는 모양이었다. 순간 그 여직원이 너무도 선선히 말했다.

" 입력한 건 확실하니 그냥 지나가세요."

수동 조작으로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할머니 넷은 무사히 주차에 성공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쾌적한 야외 테이블에서 맛있는 음료팥빙수, 2시간가량의 수다를 즐겼다. 친절한 그 직원에게 커피라도 한 잔 배달해 주어야겠다고 서로 화제에 올리긴 했지만 수다 삼매에 빠져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의 무료 티켓이 있었다. 함께하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 두 장을 신청했다. 거의 오 년 만에 카톡으로 연락을 했더니 바로 응답이 왔다.

"좋아요."

10년 전 성서 백주간 봉사자로 나를 좀 더 행복한 신앙생활로 이끌어 준 교우다. 나보다 여섯 살 어리지만 훨씬 어른스럽다. 성당 길 건너 살고 있던 집이 최근 재건축 중이라 지금은 멀리 계양에서 살고 있다는데도 흔쾌히 바로 승낙한 것이다. 연주회 시작 시간보다 1시간 반 먼저 만나 모짜르트하우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볼일이 있어 조금 늦겠다던 자매는 정시에 도착한 나보다 먼저 와 이미 식당 입구 대기자 명단에 이름까지 올려놓았다. 한참 기다린 끝에 우리 차례가 되어 실내로 안내되었다.

모짜르트하우 이탈리안 요리는 항상 훌륭하다. 오늘도 그랬다. 둘이 주문한 먹물오징어 리조또와  올리브아보카도 콜드파스타는 과연 이탈리안 요리의 풍미가 가득했다. 가성비도 좋다. 이 식당은 거의 모든 시간 사람들로 붐빈다.


식사를 마치고 무료 입장권을 선물해 준 이 카톡으로 알려준 대로 입장권 수령 창구 앞으로 갔다.

IBK 챔버홀 <김유경 바이올린 리사이틀> 티켓 창구. 긴 줄의 맨 뒤에 섰다. 연주회 시작 시간까지 그리 여유롭지 못해 살짝 긴장되었다. 단정하고 친절한 젊은이 두 명이 좁은 안내 스크 안에서 서로 몸을 비켜가며 날렵하게 움직였다. 내 차례가 되자 금세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 찾아내어 척하니 건네 준다. 계속 몰려드는 사람들로 길게 늘어났던 줄은 바로바로 줄어들었다.


홀에 사람들이 꽉 차고 뒤이어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클래식에 그리 귀가 밝지 못한 나도 연주자의 당당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연주 실력에 바로 빠져들었다. 난이도가 높은 작품을 실력으로 정복한 연주 속으로 관객도 연주자도 피아노 반주자도 모두 몰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연주자 김유경은 5세에 프랑스 불로뉴 국립 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하여 귀국 후 예원학교, 울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수상경력과 연주이력도 화려하다. 오늘 사용되는 바이올린은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카밀로 드 카밀리가 제작한 1741년 산이라고 한다.

피아노 반주자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1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중간에 두고 연주가 이어졌다. 앙코르 곡까지 1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주자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연주 도중 끊겨나간 줄들이 바이올린의 한 쪽 너트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 화려한 춤을 추었다.


전문가들로부터 '상적이고 압도적인 연주'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딱 맞는 표현이다.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우리 청년들의 기량은 뛰어나다.


百歲시대, 白手시대로 다가오는 미래 사회, '무인화, 자동화, 홀로'라는 세 단어로 압축된다는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만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조금은 무섭게 여겨진다. 특히 컴퓨터 활용 능력이 꽝에 가까운 컴맹 할매에게는 더 그렇다.


오늘 하루는 각계각층에서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의 친절한 서비스와 유능한 기량 덕분에 흐뭇다.

생명력이 넘치는 젊은이들의 향기에 흠뻑 젖어 행복하게 잘 지낸 고마운 하루였다.


이튿날, 퇴근 후 집에 들른 아들에게 도서관 주차권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직원에 대한 칭찬 기록을 남겨주는 것이 제일 큰 보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오잉?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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