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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26.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2

   사랑스런 그녀들

 별로 빠릿빠릿하지 못한 나는 매사에 앞서서 잽싸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약간 뒤로 빠져서 천천히 움직이는 편을 선호한다. 수영장 사용도 마찬가지다. 조금 늦게 고 맨 뒤에 쳐져서 나오면 편하고 자유롭다. 그런 면에서 강습이 없는 자유수영이 나에게는 딱 맞는 프로그램이다.

 부지런한 몇몇 형님들은 일찍 입장해서 종료 시간보다 일찍 나가신다. 마무리 체조는 생략이다. 일찍 나가 샤워실의 뜨끈한 물줄기를 차지하고 느긋하게 즐기신다. 


 오늘도 살짝 늦게 나왔다. 일찍 나온 형님들은 이미 샤워를 끝내고 탈의실로 건너가는 시간이다. 의실에서는 화장품을 바르고 옷들을 챙겨 입으면서 삼삼오오 흉허물 없이 온갖 이야기들을 다 나눈다. 오랜 시간 동안 일주일에 번씩 아침 시간을 함께해 왔으니 이웃사촌이 따로 없다. 할머니들의 정겨운 동네 사랑방이다. 석 달째로 접어드는 나는 슬며시 웃으며 귀동냥만으로 만족한다.


 정각에 시작하고 50분에 끝나는 수영 시간.

샤워실의 가장 복잡한 시간은 조금 지나간 듯하다. 비어 있는 샤워 꼭지가 몇 개 된다.   하나 밑으로 다가갔다. 옆을 보니 낯익은 형님이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씻는 중에 형님이 말을 걸어온다.

 "머릿결이 좋아." 

 "이, 그렇지도 않아요." 

 "얼마 짜리 파마해?" 

 "8만 원짜리요. 동네 단골 미용실에서 해요."

 "훌륭한 남편이야." 

 "예에?" 

 "마누라가 8만 원짜리 파마할 수 있으면 훌륭한 남편인 거야. 나는 그렇게 못해."

 자세히 보니 형님은 생머리시다. 멋쟁이 노인들의 가장 세련된 헤어스타일이다. 머리카락 숱이 적거나 힘이 없으면 도전하기 어렵다.

 

 "형님 남편분은 어떠세요?"

 "훌륭한 남편이야."

 "어떤 면에서요?" 

 "집에서 여자가 하는 일을 다 할 수 있어."

 즉각 대답하시는 어조가 단호하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80세, 나와 띠동갑인 형님에게 은근한 지혜의 품위가 느껴진다. 배우자에게 존중받는 아내의 권위까지 배어 나온다. 정말 그렇다. 여든넘으신 남자 노인분이 아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사에도 적극 참여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내인 형님은 남편의 그런 면을 높이 산다는 것이다. 멋진 부부다.

  "형님, 짱이에요. 정말 그렇네요. 냉장고를 열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남자들도 많은데  대단하세요, 멋지세요."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데 또 말을 걸어온다.

 "대구 사람이야?" 

 "아뇨, 부산이에요. 왜요?"

 "말에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네에,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있어요." 


 "부산 어디야?"

 옆에서 몸을 고 있던 다른 할머니 한 분이 물어 오신다. 낯선 얼굴이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것을 보니 다음 수업 수강자이신 모양이다.

 "가야예요. 서면에서 구포 쪽으로 조금 올라가요."

 "나는 초량이야, 초량 국민학교 나왔어."

 ", 초량. 중ㆍ고등학교 6년 동안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나는 혜화여중을 나왔어." 

 그분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출신교를 밝히신다. 비평준화 시절이라 중ㆍ고등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갑자기 그분과의 대화가 활발해졌다.

 "난 왕십리에서 와." 

 "네에?"

 이곳은 서초구민 체육센터다.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와. 우리 동네에는 이런 시설이 없어. 충무로에 하나 있는데 5만 원이야. 여기는 2만 5천 원이잖아. 30년째 다니고 있어. 오고 가는 것도 다 운동이야."


 연세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78세, 나보다 살이 많으시다. 그분의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서른 살에 남편이 세상을 났어. 워낙 술을 좋아하다 돈 한 푼 남기지 않고 아들 둘을 남기고 그렇게 떠났어."

 "아이구, 어떻게 사셨어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파출부 일을 오래 했어. 그러다가 난소암을 게 되었고 큰 수술을 열 도 넘게 했어." 

 "언제부터요?" 

 "언제부턴지 기억도 나지 않아."

 그러고 보니 한쪽 가슴이 잘려 나가고 없다. 밋밋하다.

 "심장에 스탠트를 은 지도 오래됐어.

낡아진 스탠트를 바로 잡느라 여러 차례 시술을 받아왔는데 이제 다시 이상이 생기면 이번에는 가슴을 열어야 한대."

 여전히 표정은 밝고 목소리도 차다. 아, 경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서전 한 권 쓰셔야겠어요." 

 "안 그래도 한양대학 선생님이 기사로 내야 되는  아닌가 생각하신대."

 따스한  물살에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 빛나는 금빛 목걸이와 귀걸이가 눈길을 끈다. 물속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고 발에 밟히면 위험하기도 한지라 수영장에서는 장신구 착용이 금기 사항이다. 하지만 나는 멋지고 예쁘다고 한껏 감탄해 주었다. 얼핏 내려다본 눈에 바알간 엄지발가락이 보인다. 봉숭아꽃 색깔이다.

 "와아, 봉숭아 물들이셨네요."

 "이제 거의 다 빠져나갔어."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여 주신다. 바알간 봉숭아 꽃물이 손톱 끝에 조금씩 남아 있다. 나의 즐거운 웃음에 본인도 밝은 웃음을 보탠다.


 평범한 수영복과는 달리 바지에 가까운 수영복을 어렵게 입으시는 것을 도와 드리며 물었다. 

 "이건 좀 기 어려운데요."

 "나는 이게 좋아."

 "아, 네에. 인연 되면 점심 사 드릴게요." 

 "이렇게 시간이 다른데 그게 되겠어? 세 명 짝이 있어. 이 동네 식당 다 다녀 봤어. 도서관 식당에서도 먹어 봤어."

 내 대답은 무조건 하나다. 

 "정말 잘하시네요. 정말 잘하셨어요."

 채비를 마친 그분은 옆에 놓아두었던 오리발까지 챙겨 들고 씩씩하게 수영장으로 향하신다. 


  80세, 78세의 두 분. 지혜롭고 용감하신 형님들이 오늘 아침 내 연애 감정을 진하게 건드린다.

 깊어가는 가을, 괜히 썰렁해지는 내 마음이 존경으로 환하게 밝혀지고 감동으로 따뜻하게 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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