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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03.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4

  제10회 피천득 다시 읽기

 인생은 한마디로 감격이다.

 문학의 본질은 情이다.

 항상 정직하라, 남에게 관대하라,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라.

  ㅡ피천득


 샤워 후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꾹 눌러쓴 모자 속에 쏙 감추고 등에 멘 가벼운 배낭을 슬쩍 한 번 더 추스르며 수영장 문을 나선다.


 꽤 이른 시간부터 집안 곳곳을 살펴보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수영장 가는 길은 늘 시간에 쫓긴다. 매연가스 가득한 8차선 대로를 허겁지겁 뛰다시피 서둘러 간다. 하지만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편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산책로로 접어든다. 피천득 문학 산책로. 바로 옆에 있는 주공 아파트에서 선생님이 오래 셨던 인연이라고 한다.


 곳곳에 선생님의 작품이 새겨진 비석이나 하얀 돌의자들이 놓여 있다. 무릎 위에 공책을 펼쳐 두고 손에는 연필을 쥔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 벤치 위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의 동상도 있다. 지나다닐 때마다 절로 시선이 가 닿는다. 어떤 날은 누군가 마스크를 씌워 놓기도 한다.


 오늘은 색다르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9월의 짙은 초록 나무 가지 사이에 길고 하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제10회 피천득 다시 읽기

 2022년 10월 6일(목) ~ 11월 3일(목)

 매주 목요일 15:00~17:00

 심산문화센터 2층 6호실

 금아 피천득 선생 기념사업회


 바로 찰칵, 핸드폰에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무심히 지내다 강의 시작이 임박해졌을 즈음에야 전화 접수를 했다. 모집 인원이 초과되었지만 접수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곧이어 날아온 핸드폰 카톡방에는 150여 명의 신청자 명단이 올라 있었다.


강의 일정

첫째 주

피천득의 詩心 ㅡ 이근배(시인)

둘째 주

피천득 초기 시 세계의 특징 ㅡ 이승하(시인)

셋째 주

피천득과 음악 (피천득 산책길 함께 걷기) ㅡ 정정호(문학비평가)

넷째 주

수필가의 피천득 수필 읽기 ㅡ 최원현(수필가)

다섯째 주

동서양 사상 통합의 선구자, 피천득 선생님 ㅡ 이만식(시인)


 첫 시간은 이근배 시인의 갑작스런 발병으로 선생님의 애제자인 박희진 님이 보내주신 편지글을 듣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학 입학 이후 졸업과 취업과 결혼, 사회생활로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친정아버지처럼 살갑게 챙기고 아껴주신 선생님의 사랑을 회고하는 긴 글이었다. 낭송 전문가인 고순복 님이 대독해 주었다.

 < 어느 여교수의 회고록, 그런데도 못다 한 말>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는 선생님의 철학이 제자의 글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주고받는 살가운 인정이 넘쳐흘렀다.


 이어서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라고 스스로 소개하신 정정호 교수님의 선생님에 대한 회고담이 이어졌다.

 

 선생님의 부친은 상업으로 장안의 소문난 부자였으며 어릴 때 선생님은 유치원과 서당을 동시에 다니셨다. 그러나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 살에 어머니를 장티푸스로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워낙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보통학교를 2년이나 월반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였다. 당시 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는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이광수가 이 소식을 듣고 피천득을 찾아왔다. 이광수는 피천득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여 당신 집에서 3년을 거주하게 하고 琴兒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다.


 일본 유학이 대세였던 그 당시의 시류와는 달리 동양의 파리, 상하이에 있는 후장 대학 영문과로 유학을 갔다.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다.

 그곳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매료되어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그분을 일생의 인생 스승으로 모셨다. 창씨 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일제 말기에는 절필하고 금강산에서 1년간 머물며 법화경, 유화경을 공부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서울대 교수로 초빙되어 예과 영문과 교수를 지내다 사범대학으로 옮겼다.

 20여 년간 고등학교 영어 국정교과서를 집필했으며 44세인 1954년, 1년간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 교수를 다녀왔다. 선생님의 가장 사랑하는 영문시는 키이츠의 <그리이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이다.


 선생님의 시 세계를 알아보는 둘째 시간, 강사는 이승하 시인이다.


 선생님은 1930년 4월 7일, 동아일보에 자유시 <차즘(찾음)>으로 등단했으며 1947년, 첫 시집 <서정시집>을 펴내셨다. 시인으로서는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창가 가요 조의 동시, 시조, 시를 신 독보적 존재이시다. 


 선생님의 시 세계는 일찍 떠나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서가 주류를 이룬다. 피천득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이며 사무친 그리움, 여성적 모성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잘 나타나 있다. 조금씩 성숙해 가면서는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시도 100여 편, 수필도 100여 편 남기셨는데 수필가로서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아쉽다. 선생님은 탈장르, 장르 통합을 이미 실천하셨다. 시인으로서의 선생님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을 누르고 이겨야 하는 세상에서는 시가 잘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 시를 읽어야 한다. 가장 시가 필요한 때다. 시는 최고의 영혼의 양식이며 교육이다. 마른나무에 꽃이 피는 일이다.

  ㅡ 피천득


 셋째 시간인 피천득과 음악, 강사는 문학비평가 정정호 교수님.


 문자 문학의 한계를 넘어 소리 문학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선생님은 시 낭독과 암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시험에는 암송을 꼭 한 편씩 출제하셨다. 음악성이 뛰어난 선생님의 시는 스무 편 가까이 노래로 작곡되어 불린다. 특히 김순애 교수는 선생님의 시 10편을 가곡으로 작곡하였다.

 1974년 퇴직 이후 97세로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34년을 버티신 힘은 시와 음악과 그림이었다. 일생 음악으로 삶의 권태와 번뇌를 타고 넘어갈 수 있었고 숭고한 신이 주는 은혜인 기쁨과 평강에 다가갔다. 만년에는 하루에 5시간 이상 FM 방송과 음악 CD를 들었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장에는 베토벤 소나타 31번이 울려 퍼졌다.


 네 번째 최원현 님의 피천득 수필 강의 시간에는 일꼬스모 회원 여섯 명이 함께했다.


 선생님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수필에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수필은 일상의 정감을 섬세한 필체로 서정시처럼 곱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최초의 수필은 1932년 5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은전 한 닢>인데 시적 리듬감과 소설적 기법을 다 담고 있는 콩트적 수필이다. <수필>과 <인연>은 명실공히 한국수필 문단뿐만 아니라 독서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으며 사그라지지 않는 명저 명작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읽히고 있다.

 

 수필은 내 格이 들어가는 내 이야기이니 교만해서는 안 된다. 수필은 자기 주관대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글이며 내 삶의 경험들을 문학화시킨 것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테마 수필이 있다. 그것을 재미있게 써야 한다. 내가 쳐 놓은 거미줄에 독자를 어떻게 가둘 것인가? 자기만의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서구의 에세이 모방이 아닌 한국적 정서로 태어난 수필을 공부하는 수필 창작론이 필요하다. 수필의 힘을 의식해야 한다. 수필 한 편을 읽은 감동이 소설 한 편 읽는 것보다 더 클 수 있다.


 다섯째 시간, 동서양 사상 통합의 선구자, 피천득 선생님.


 강사이신 이만식 시인은 피천득 선생의 한국 문학사에서의 위상을 강조했다. 피천득 선생님은 영문학은 물론 중국문학, 일본문학에 대해서도 해박하셨다. 한국 문학에서는 근대 세계관과 탈근대 세계관이 혼재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 가장 필요한 동서양 사상 통합의 선구자이셨다.


 모든 강사분들과 참석하신 수강생들은 한결같이 선생님을 사모했고 존경하였다. 대부분 일흔을 넘는 나이들이었고 선생님의 서울대학교 제자들이었다. 평소에도 다양한 글 모임을 이끌며 글을 쓰고 책을 펴내어 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쟁쟁한 분들이셨다.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는 스승을 높이 기리며 회원들끼리는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독특한 시니어 그룹이었다.


 마지막 강연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선생님의 책 두 권을 대출하였다.

 <인연>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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