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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11.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6

  공중탕

 아침나절, 우연히 내다본 베란다 창문 밖으로 희끗희끗 하얀 눈발이 휘날린다. 쌀랑한 12월의 대기 속에서 잠시 내린 진눈깨비로 끝난 흰 눈은 땅 위에 닿자 금세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내 마음은 급해졌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땅이 꽁꽁 얼어붙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네, 나 좀 목욕탕에 데려가 줘."

 이 말이 계속 내 마음 한 귀퉁이에서 졸졸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이틀 전 큰언니에게 넣은 안부 전화에서 들은 말이다. 자립심 강한 언니에게서 처음 듣는 이 부탁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나는 혼자 너스레를 떨었다.

 "응, 그럴게, 언니."

 "목욕탕 같이 가요."

 "재밌겠다."

 "기대되네."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언니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우리 옛날에 가 본 적 있잖아?"

 "고마워."

 나보다 열네 살 많은, 여든두 살인 우리 큰언니. 형부는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결혼하지 않은 아들, 쉰 살이 다 되어가는 외동아들과 단둘이 산다.


 야무지고 똑 떨어지는 성품의 완벽주의자인 언니는 해방 전인 1941년에 태어났다. 일곱 남매의 장녀로서 집안의 든든한 대들보, 어머니의 왼팔이었다. 어머니의 오른팔은 언니보다 다섯 살 많은, 나보다는 열아홉 살이 많은 장남, 우리 큰오빠이시다.


 인문계 중ㆍ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나온 나와 달리 큰언니는 국민학교 졸업으로 학교를 끝내었다. 뛰어난 학업 성적과 성실한 성품을 썩히기 아까워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한 동네에 살던  국민학교 교감 선생님이 당신의 양녀로 삼아 큰언니를 데려갔다. 하지만 언니는 엄마가 그립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 바로 그다음 날로 우리 집으로 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감당하기 힘든 열세 살 어린 소녀의 외롭고 슬픈 하룻밤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장남인 큰오빠가 고등학교로 진학한 반면 언니는 학업을 접었다. 가사를 도우고 농사일을 거들었다. 처녀 시절에는 방직공장에 취업하여 주ㆍ야간 교대 근무를 해 가며 알뜰살뜰 집안 경제를 도왔다. 1968년 결혼하여 형부가 계시는 서울로 떠나가기까지 언니는 성실히 그 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의 신혼 생활 동안 언니는 영등포에 있는 학원에서 중ㆍ고등 학업 과정을 수료했다. 형부가 출근하신 낮시간 동안 언니는 학업에 열중하며 요리도 배우고 뜨개질에도 열성이었다. 비닐 장판 깔린 한 칸짜리 방바닥은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이 반들반들했다. 언니는 동네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했다. 야무지고 친절하고 철저한 학습 지도로 몇 년을 계속 다니는 고정 단골 아동들이 생겼다. 집을 마련하여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꽤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다. 여동생과 나는 언니가 제대로 학업을 계속했더라면 분명 뛰어난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이 되었을 거라고 입을 모으곤 한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해마다 언니는 나를 불러 올렸다. 부산 발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나는 서울로 왔다. 언니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에 나가 예쁜 옷을 사 입히고 엄마 옷과 새학기 등록금까지 꽁꽁 챙겨 주었다. 철없는 나는 주는 대로 받아 쥐고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새 옷 차림으로 다시 부산행 기차를 탔다.


 졸업과 결혼 후 나도 서울로 옮겨왔다. 언니 집 바로 옆에 살면서 언니의 보살핌을 학창시절보다 더 많이 받았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80줄의 언니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4년 전, 언제 돌아올 계획도 없이 함안으로 떠나갈 때 작별 인사차 언니 집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그때도 언니는 다리가 많이 불편했다. 몸 전체의 상태로 보아 수술을 감행할 수 없다고 했다.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다가구 주택 2층 계단을 내려와 큰길 앞까지 꼭 따라 나왔다. 고운 미소를 띠며 내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똑하니 서 있었다. 두세 번 돌아볼 때마다 한결같은 자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시 등 돌리고 전철역을 향하며 나도 모르게 손수건 적시던 아련한 시간들이 지금도 그 길에 깔려 있다.


 2년 후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언니는 언제나 있는그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반겨 주었다. 그동안 언니는 더 약해졌고 기억력도 떨어졌다.

 나와 언니는 핸드폰 유튜브 음악을 반주 삼아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을 부르고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을 불렀다.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같이 보며 아이들이나 친척들의 근황을 나누었다. 짬짬이 언니의 똑같은 질문이 이어지고 나도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김서방 건강은 어떻노?"

 "응, 그냥저냥 괜찮아, 잘 지내요."


 조카가 살림을 정말 잘해서 당신처럼 편한 팔자가 없다며 매번 아들 칭찬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 아들 한 명 잘 키워 보려고 애살 많은 언니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완벽주의 엄마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아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과는 달리 조카는 그냥 집안에 머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다. 형부와 언니가 근검절약하여 알뜰살뜰 관리해 온 덕에 소박한 살림은 안정되어 있다. 언니에게는 최고의 맞춤형 요양원이다. 내가 집을 나설 때 언니는 이제 현관 밖까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아침 일을 끝내고 언니 집으로 향했다. 조카가 차려주는 점심을 같이 먹었다. 집에서 씻어 간 봄동 야채를 식탁에 올렸다. 시장에서 사 온 완제품 반찬들로 식탁이 풍성하다. 봄동 여린 잎 두 장 사이에 낱장 치즈를 끼워 쌈을 만들었다. 맛있다며 반긴다.


 공중탕 나들이 준비를 했다. 걸음걸이가 시원찮은 정도가 아니라 어려운 형편이다. 힘주어 지팡이를 꽉 쥔 손이 힘없이 바르르 떨린다. 한 걸음 옮기기가 힘든데 언니는 어쨌든 최선을 다하여 몸을 움직였다. 어설픈 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카가 성심껏 최선을 다하여 엄마를 보살폈다. 옛날 생각만으로 걸어서 가겠다던 언니도 마음을 바꾸었다. 택시를 탔다. 공중탕 건물 입구에서 내렸다. 힘들게 타고 내리는 꿈 뜬 동작을 조카가 세심히 보살폈다. 지하 3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지만 지하 4층에 있는 여탕 입구까지는 또다시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다. 언니의 의지와 조카의 보살핌으로 힘들게 여탕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내 몫이다. 마음 편하게 온전히 언니 편이 되어 천천히 움직였다. 따뜻한 욕탕에 몸을 담그고 때를 벗기고 머리를 감았다. 언니는 여러 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목욕탕 온 지 오래됐대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언니는 충분히 목욕을 즐겼고 나는 언니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동을 성심껏 감싸 안으며 도왔다. 두 시간이 흘렀다. 평온한 미소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협조적으로 나와 함께하는 언니의 예쁘장한 얼굴과 작고 하얀 몸이 귀여웠다. 탈의실로 나와 천천히 옷을 챙겨 입고 둘이 활짝 웃는 얼굴로 셀카도 찍었다.


 '언니랑 언제 다시 이 공중탕에  수 있을까?'

 '언젠가 혼자 찾아와 나 또한 늙고 쓸쓸한 마음으로 지나간 이 시간을 떠올리지나 않을까?'


 어머니를 모시고 간 조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ㅡ  이모, 오늘 엄마 목욕시킨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이모,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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