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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18.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7

  소꿉놀이

 우리 아파트의 재활용품 분리수거일은 매주 목요일이다. 쏟아져 나오는 물량이 대단하다. 뒷갈무리하는 경비 아저씨들의 손길이 하루 종일 바쁘다.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용기들이 가득 담긴 큰 자루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나 어릴 때 저런 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꿉놀이할 때 정말 잘 썼을 텐데ᆢ.'


 뒤뜰 꽃밭 앞, 앞뜰 축담 밑, 반반한 흙 마당, 둥치 굵은 느릅나무 그늘 밑, 볕 좋거나 그늘 시원한 곳 찾아다니며 오종종하니 쪼그려 앉아 요것조것 상 차려 내던 시절. 꽃을 따고 잎사귀를 모으고 예쁜 돌멩이를 주워 오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 속에 쏟아 넣은 정성과 이야깃거리들은 차고 넘쳤다. 아무리 거듭해도 시들하지 않은 놀이였다. 새삼 까마득히 그리워진다.


 아이들이 모두 가정을 꾸려 독립하고 둘만 남은 공간. 희부염하니 밝아오는 바깥 기운이 아침을 알린다. 새벽잠이 적은 탓에 하루의 시작이 빠르다. 집안 구석구석 잘 비치되어 있는 소꿉들이 나를 반긴다. 소파, 냉장고, 식탁, 싱크대, 조리기구들 ᆢ. 갑자기 찾아온 밝은 전등 불빛을 받아 반짝 정겨운 얼굴들을 드러내며 밤새 안녕을 인사한다. 언제나 같은 그 자리를 신의 있게 잘 지키고 있다.


 깨끗하게 잘 말라 있는 싱크대를 살펴보고 잘 건조된 빈 그릇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냉장고 문을 연다. 어제저녁 물에 불려 두었던 미역을 꺼낸다. 오늘 아침 메뉴는 쇠고기 미역국이다. 양파와 오이 피클이 간당간당하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단 한 젓갈도 조심하는 남편을 위한 단골 고정 밑반찬이다.


 투명하고 동그란 유리컵에 고운 주홍빛 부드러운 홍시를 담는다. 좋아하는 그릇, 즐기는 음식이다. 까끌한 껍질 부분은 손질하는 속속 내 입으로 들어가고 컵에는 부드러운 홍시 속살만 담긴다. 달콤한 게 입맛을 돋운다. 천천히 천천히 서른 번 이상 씹으며 힘들게 힘들게 맛없는 밥을 먹는 남편 앞에서  이것저것 선 채로 적당히 끼니를 때우며 홀로 부엌 소꿉놀이를 한다. 골고루 갖춘 과일 그릇을 내놓고 잔반을 체크한다. 냉장고 안의 식재료들을 살펴보고 점심 저녁 메뉴를 떠올린다. 장 보아야 할 품목들과 빨리 써야 할 재료들이 결정된다.


 저녁 무렵, 해그늘이 들기 시작하기온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가족 카톡방이 부산스러워졌다.

 ㅡ꽁꽁 싸매고 다니셔요.

 ㅡ조심조심 다니세요.

 ㅡ오늘 엄청 춥던데 온도 꼭 따뜻하게 하시고 가습기도 적극 활용하세요.

 세탁이 방금 끝난 축축한 빨래들이 걸려 있는 건조대 사진을 가족방에 올렸다.

 ㅡ뚀아!

 이모티콘이 떴다.


 저녁을 끝내고 설거지도 마쳤다. 오늘 하루의 소꿉놀이가 끝났다. 눈길 닿는 대로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본다. 급하게 손 갈 곳은 없다. 창가에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온통 내 물건들이 잡동사니들처럼 널려 있다. 안경, 수첩, 필기도구, 손수건, 핸드폰ᆢ. 옆으로 살짝 밀쳐 두고 잠깐 책을 뒤적이는데 남편이 한마디 툭 던진다.

 "작품 속에 앉아 있네."

 "네에?"


 고개를 드는 순간 피식 웃고 만다.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에 건조대 하나 가득 채워 널려 있는 빨래들이 있다. 반듯반듯 각 잡아 굵은 옷걸이에 걸어 놓은 겉옷들, 톡톡 털어 주름살 편 타월들, 꼭꼭 눌러 모양 잡은 양말, 폭폭 삶아 뽀얗게 빛나는 행주, 손수건, 내의들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 정겹다.

 우리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편하게 보살펴 주는 소중한 물건들이다. 뽀송뽀송 말라가는 정갈한 그 모습이 아닌 게 아니라 꽤 괜찮은 작품처럼 여겨진다. 가사에 쏟는 쉼 없는 아내의 수고가 순간 남편의 마음에 슬쩍 와닿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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