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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22.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8

  파자마 파티

 "차암, 별짓을 다 하네."

 못마땅해하는 남편의 불만 섞인 핀잔을 뒤로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몇 달 전부터 여고 동창 네 명과 계획한 파자마 파티 날이다. 70을 코앞에 둔 한 해를 보내며 12월 둘째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점심까지 1박 2일, 24시간을 함께 행복하게 보내기로 약속했다. 50년 이상을 이어온 인연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인정하기에 이해하고 배려하며 고마워하는 귀한 자원이다. 보이지 않는 큰 힘으로 내 삶을 응원해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문을 나서는 순간 집에 관한 것은 털어 버린다.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점심, 세끼의 메인 디쉬는 투명한 글라스락 용기에 담아 냉장고 맨 앞, 눈에 잘 띄는 곳에 줄 세워 놓았다. 데우기만 하면 된다.

 며칠 전부터 신경 썼지만 새벽부터 시작해 오전 내내 정신없이 바빴다. 점심도 차려 먹었고 부엌 정리도 끝났다. 이제 두 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냅다 내달리면 된다.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세 할매들은 서로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오늘 장소를 제공하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웃고 먹고 노는 일만 할 것이다.


 만능 주부인 주인장 친구가 준비해 놓은 저녁상이 차려졌다. 이름하여 코스 요리. 첫 메뉴는 홍가리비찜이었다. 껍데기를 솔질로 싹싹 깨끗이 씻어내고 넓은 냄비에 물을 조금 깔고 가리비를 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김이 솔솔 오르고 조금 뒤 냄비 뚜껑을 열었다. 입을 짝짝 벌리고 연한 주홍 속살을 드러낸 가리비가 분홍 하양 예쁜 양면 껍데기 위에 앙증맞게 놓여 있다. 가리비 윗껍데기를 떼어내고 고운 껍데기째  커다란 접시에 하나씩 올렸다. 그 사이 거실로 옮겨놓은 식탁 위에 테이블 세팅이 완성되었다. 따끈따끈 짭조름한 가리빗살을 맛보며 한 마디씩 한다.

 "아, 예쁘다."

 "연하다."

 "비너스의 탄생, 그림 같다."

 다 먹고 흔적만 남은 홍가리비 껍데기가 참으로 곱다. 그 사이 바지런한 주인장은 음식 접시를 계속 나른다. 청경채쇠고기버섯볶음, 샐러드, 보라색동치미, 배추김치, 총각김치, 마늘고추장아찌, 쇠고기배춧국, 잡곡밥 ᆢ.

 맛있다는 소리를 연발하며 식사를 마치고 후다닥 설거지도 끝냈다. 여자 네 명이 알아서 움직이니 모든 일이 매끄럽고 순조롭다. 각자 준비해 온 소박한 선물들을 주고받았다. 가방이 올 때보다 더 무거워졌다.


 이제는 운동 시간. 식탁을 벽 쪽으로 옮기고 네 명이 나란히 설 공간을 확보했다. TV 화면을 YouTube에 연결시키고 지니를 불러내었다. 한 번만에는 못 알아듣는 우리들의 사투리 발음에 또 한 차례 웃음보가 터진다. 첫 곡으로 '한 잔 해'를 골랐다. 동네 문화센터 건강체조 프로그램에서 들었다고 했다.

 한 잔 해, 한 잔 해, 한 잔 해.

 갈 때까지 달려 보자. 한 잔 해.

 오늘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달려, 달려, 달려, 달려. 

 

 커다란 티브이 화면 영상과 왕왕대는 스피커의 음악 소리. 가수와 백댄서들의 현란한 몸놀림을 따라 우리도 열심히 흉내를 내 본다.

 하하하 웃기 바빴다. 생경한 노래 가사에 웃고 우리들의 어설픈 동작에 웃으며 생각나는 대로 여러 트로트 곡들을 불러 내었다. 동영상 촬영도 했다.


 숨을 가다듬고 영화나 한 편 보자며 Netflix를 켰지만 영화는 완전 뒷전이고 수다 잇기로 바쁘다. 할매가 넷이면 사발이 깨지려나? 안방으로 들어간 친구가 화투를 들고 나온다. 백 원짜리 동전이 넉넉히 담긴 지퍼백과 방석도 같이 챙겨 온다. 며칠 전 놀다 간 이웃 아주머니가 그 남편이 재밌게 놀다 두고 오라고 준비해 준 화투와 동전 주머니다.


 화투라 ᆢ, 언제 적 이야기던가? 일단 해 보기로 했다. 몇 가지 게임들을 기억해 냈지만 뭔가 아닌 것 같고 맹숭맹숭했다. 결국 고도리로 결정 났다. 옛날옛적에 듣고 봤던 것을 기억해 내며 어설픈 화투판을 벌였다. 용도를 모르는 죠커 넉 장은 뒤로 빼 버렸다. 똑같이 나누어 배급받은 동전이 바닥나는 사람이 나오면 끝내자. 삼 점 당 백 원. 시간이 흘러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덧 자정을 넘은 한 시. 준비해 놓은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각자 단잠을 잤다.


 여유롭게 편하게 일어난 이튿날도 먹는 일로 시작했다. 해외 직구 유기농 통밀가루를 이스트로 40분 간 발효시켜 즉석에서 프라이팬에 구워 만든 건강빵이 따끈따끈한 갈색 옷을 입고 접시 위에 올랐다. 잼과 바질 샐러드, 방금 찐 따뜻한 달걀, 아삭아삭 껍질째 먹는 유기농 사과, 우유. 훌륭한 아침이었다. 현관을 나서며 하룻밤 잘 지낸 집을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카카오 택시를 불러 근처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꽤 추운 날씨였지만 모두 방한 준비가 충분했다. 데크길과 흙길을 골고루 밟아 보고 호숫가 갈대 사이에서 사진도 찍었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넓은 통유리 너머 넓은 호수와 예쁜 집들을 구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어느덧 점심시간. 무조건 좋은 것을 먹자는 데 만장일치. 한 친구의 남편이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건네준 금일봉 하사금이 있었다. 쇼핑몰 2층에서 찾아낸 인도 카레집. 독특한 삼색 카레가 맛깔스러웠다. 가성비도 좋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셋은 같은 방향의 버스를 타고 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남긴 흔적들을 뒷설거지하느라 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준비보다 핸드폰에 더 빠져 버렸다.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들과 동영상 두 편과 댓글들. 혼자 빙긋이 웃는다.

ㅡ 친구들이 먼 길 마다 않고 와서 즐거운 시간 보냈네. 건강하게 오래 좋은 시간 나누며 살자. 춤추는 영상을 보면서 자꾸 웃게 된다.

ㅡ 자꾸 웃을 수 있는 일만 해야지.

ㅡ 덕분에 올해를 많이 웃으며 마무리하게 됐네. 동영상을 보니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안 따라주는 현실을 보는 듯ᆢ. 그래도 볼수록 재밌다.

ㅡ 행복한 시간 함께했다. 또 쭈욱 건강하게 잘 지내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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