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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24. 2022

지금, 연애 중입니다. 9

  가족전쟁

 효도수영반인지라 단연코 연세 높은 어르신들이 많다. 내년이면 앞에 9자가 달리니 이제는 남 부끄러워서 등록을 못하겠다는 말을 하시기도 한다. 옆에 있던 우리들은 곧바로 극구 만류 멘트를 날린다.  

ㅡ아니에요, 형님들 덕분에 이 좋은 시간에 이 반이 운영되고 있는 거예요. 형님들이 든든한 뿌리입니다. 계속 열심히 나오셔야 해요.ㅡ

 그 말을 들으며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피우신다. 방금 하신 말씀은 바로 무효가 된다.


 자유수영 시간인 데다 경로우대 가격이 적용되니 수영장 입장에서 보면 수익이 적고 강사분들에게는 레슨비 수입도 없는 반이다. 그런데도 9시에서 9시 50분이라는 황금 시간대에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 수영장으로부터 시간을 옮기면 어떻겠느냐는 제의에 십 년 이상 단골 고객인 형님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셔서 그대로 이 시간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수영을 마치고도 오전의 다른 일들을 볼 수 있어서 이 시간대가 참 좋다.

 80대 후반, 90으로 접어들면서도 계속 수영장을 찾으시는 그 기상과 의지가 대단하시다.


  깁스 한 한쪽 팔을 비닐로 꽁꽁 감싸고 샤워실을 거쳐 입장한 수영장에서 팔을 위로 들고 물속을 걸어 다니시는 형님이 있다. 집 안의  전선 코드에 걸려 넘어져 뼈를 다쳤는데 아직 2주일이 더 지나야 깁스를 푼다고 한다.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오리발을 착용하고 몇 차례 레인을 돌아온 후로는 계속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즐기시다 일찍 나가시는 형님도 있다.

 쭉쭉 시원하게 물을 헤치고 나아가야 되는 회원들은 눈치껏 그분들을 피해 다니고 그분들도 최대한 불편을 주지 않으려 이쪽저쪽 옮겨 다니신다.


 탈의실에서도 대화가 계속된다. 옷이나 약 등 생필품 구입 정보, 결석한 회원 안부 문의, 일상사 이야기 등 다양한 화젯거리들이 펼쳐진다.

 오늘은 저만치 모여있는 형님들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환자와 같이 있으면 종일 온갖 짜증 다 받아내는 게 더 힘들어. 그러다 아이들이 방문하면 얼씨구나 내가 온갖 걸 다 고자질하지. 너네 아버지가 이랬다, 저랬다. 그러면 자식들이 이렇게 말해.

 "환자라서 그러니까 어머니가 좀 참으세요."

 그 소리를 들으면 속에서 열불이 나. 그래서 내가 마구 퍼붓지. 다 지 에비 편만 든다고 ᆢ. 한마디로 가족전쟁이 되는 거야.ㅡ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으며 혼자 생각했다.

 '형님 정말 힘드시겠다.'


 어느덧 투병 2년이 가까워 오는 우리 집 상황이 떠올랐다. 항암, 방사선 치료, 수술. 이어서 계속된 많은 검사와 입원과 치료들.

 환자인 남편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모두 최선을 다했고 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자인 나에게 지워지는 끊임없는 스트레스 과부하를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보호자 역할을 맡은 엄마도 보호해야 하는 아이들의 입장과 의도를 남편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ㅡ그건 역할이잖아.


 그래서 아이들이 선택한 것은 우리 둘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자주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일이었다.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다. 둘만의 우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와 보호자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과도한 의무와 책임의 비중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길게 오래, 나와 남편이 보호자와 환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공동체 모두를 위한 일이다.

 아이들 셋이 뜻을 모아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도 하고 정보도 나누고 병원진료에 동행하기도 한다. 안부 전화도 자주 넣는다


 아들은 평일에도 종종 우리 집에 들러 자고 가곤 한다. 아빠를 격려해 드리고 보호자인 엄마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함께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고 애를 많이 쓴다. 삼 단짜리 침구 매트도 택배 주문하여 비어 있는 작은방 문 뒤에 세워 놓았다. 결혼 4년 차인 며늘아기와는 충분한 공감과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다. 지켜보는 내 마음도 가볍다.

 큰딸은 혼자서도 오고 사위와 둘이서도 오고 중ㆍ고등학생인 두 딸들을 대동하기도 한다.

 초등 3, 4학년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일도 하는 둘째도 사위랑 신경을 많이 쓴다.


 아이들이 찾아오면 대화가 아주 풍성해진다. 경제 정보, 영화나 게임 이야기, 근황 안부, 육아 문제 등등 다양한 화제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투병 중인 건강에 관한 힘든 이야기 외에는 별로 대화가 없는 우리 둘만의 착 가라앉은 어두운 분위기가 밝은 생기로 살아난다. 그걸 알기에 아이들 셋 다 자주 우리와 함께 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이제 갓 돌을 지난 손녀부터 고등학교 일 학년 외손녀까지 다섯 명의 손주와 사위 둘 며느리 모두 진심을 다한다. 고마운 일이다.


 지지난주, 아들네 세 식구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며느리였다.

 "어머니~~"

 "왜? 뭘 빠뜨리고 안 가져갔니?"

 "아니구요, 저희가 너무 급하게 서둘러 출발한 것 같아요. 어머니, 지금이라도 내려오셔서 저희들이랑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면서 좀 쉬시지 않겠어요?"

 나는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고, 할 일이 많아서 못 나가."

 "너희들도 어서 가서 쉬어라."

 며느리도 밝게 응대했다.

 "네에~~"


 나흘 전 화요일 밤에도 아들이 다녀갔다. 퇴근 후 가진 회식 자리가 우리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였다. 밤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도착한 아들은 먼저 아빠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애로사항을 귀 기울여 들었다. 혈압, 맥박, 체온, 실내 온도, 습도들을 살펴본다. 꺼져 있는 공기 청정기를 가동하고 가습기의 물을 가득가득 채운다. 아빠의 춥다, 덥다는 말에 맞추어 각 방으로 들어가는 난방기의 개폐정도도 조절한다.

 대강 할 일들을 끝낸 후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근무 이야기, 집안 이야기, 손주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사돈 안부 등등.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고 이야기는 무르익었다. 어느덧 자정이 지났다.

 이튿날 아침, 출근을 앞둔 짧은 시간에도 티브이에 연결한 유튜브로 여러 가지 좋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소개해 주었다.


 아들이 다녀간 후 집안 분위기는 훨씬 많이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숨쉬기가 편하다. 늘 병에 관한 힘든 이야기만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일요일인 내일도 첫째네 세 가족과 아들네 세 가족이 방문하겠다고 한다. 둘째네는 세 시 미사 봉헌을 마치고 연락하겠다고 한다.

 매서운 날씨지만 북적북적한 체온으로 훈훈한 크리스마스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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