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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03. 2023

결혼기념일

  7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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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하는 숫자, 우리들의 결혼기념일.

 740908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으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장소는 부산 오륜대, 나는 대학 2학년 그는 4학년.      

 230711

 올해 7월 11일, 함께한 50년의 긴 세월이 사별로 막을 내린 날. 50년 이승에서의 부부라는 각별했던 인연이 믿을 수 없이 허망한 얼굴로 끝나버린 날.

 230918

 아이들이 다녀갔지만 혼자 맞이하는 첫 결혼기념일.


 10년쯤 전이었던가? 남편과 함께 교외로 나가는 전철을 탔다. 평일 낮시간 전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고 승객들은 여기저기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대각선 방향 좌석에 혼자 오똑하니 앉아 있는 20대 초반쯤의 한 아가씨. 단정하고 반듯한 자세와 정갈한 옷매무새가 눈길을 끌었다. 옆자리의 남편에게 낮게 말했다.

  "참 예쁘다!"

 남편이 바로 응대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모습 같아."


 남편은 종종 나의 첫인상에 대해 똑같은 말을 하곤 했다.

 "그때 그 인상적이었던 밝은 모습은 잊을 수 없어. 당신과 힘들어질 때마다 그 모습을 떠올리곤 해."

 나는 겉으로는 흥, 쳇, 배신자 따위의 말로 콧방귀를 날렸지만 속으로는 많이 고마웠다. 결혼 생활의 어려운 고비를 넘을 때마다 큰 힘이 되곤 했다. 말라가는 것만 같은 남편과의 감정통장에 변함없는 거액의 잔액이 되어 주었다.


 겉으로는 좋은 성적으로 교수님의 사랑을 받고 활발한 서클활동으로 선후배들과 몰려다니고 학과친구들과도 단짝을 이루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책에 파묻혀 지내는 알찬 듯한 시간들을 보내었지만 속은 뭔지 모르게 허하고 외로운 시절이었다.

 그때 만난 멋진 남편의 섬세하고 따뜻하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던 진한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황홀했던 시간들이다. 요즘 혼자 간혹 듣는 유튜브 심리 강의에서 Love Bombing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애정공세였을까? 아니면 한때 청춘시절의 짓궂은 호르몬의 장난이었을까?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결혼식 날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한 장면. 근엄하신 주례 교수님 앞에 예복을 갖춰 입고 빳빳한 부동자세로 꼿꼿이 서 있던 수제자 27세 신랑. 하객들은 신랑이 잘 생겼다고들 소곤거렸다. 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열아홉 살 차이 나는 큰오빠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 위로 입장하는 23세 신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신랑과 신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데 신랑은 신부가 아닌 자신의 정면 허공에만 눈길을 고정시킨 채 눈길 하나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사열받는 사관학교 모범 생도처럼. 

 주례 선생님이 몇 차례 반복해서 속삭이셨다.

 "신랑, 앞으로 나가서 신부를 맞이하세요."

 조금 떨어져 걸어가는 내 귀에도 그 말이 또렷이 들리는데 신랑은 그 자리에서 끝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큰오빠가 나를 신랑 바로 옆에다까지 데려다 주셨다.

 너무 긴장하여 바싹 졸아 있었는지 아님 무슨 생각에 그리 깊이 빠져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결혼 후 짬짬이 그 일로 놀려 먹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스리슬쩍 빠져나갔다.

 "결혼을 처음 해 보아서 그래."

 말이 되는 소리인지.


 미숙하고 결핍 많은 우리 어린 신랑 신부. 별로 성숙하지 못한 주위 친인척들. 포근하고 따뜻한 품보다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훨씬 많았다. 둘 다 고정적인 월급을 받았지만 물질도 풍요롭지 못했다.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예민하게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날을 세웠다. 이해와 공감, 소통보다는 공격과 방어를 일삼기 일쑤였다. 어린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물질적 정서적 역할에 충실하느라 우리 사랑은 점점 뒷전으로 물러났고 퇴색되어 갔다.


 조용히 싸늘하게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깊어가는 냉전의 시간들. 졸업과 동시에 발령받은 첫해의 병아리 국어교사로 출근한 교무실에서 혼자 우는 적도 많았다. 선배 교사들이 명언을 던졌다. 7년을 사귄 것보다 일주일 살아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생뚱스럽게 한고집하는 나도 그에게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한 이불 아래에서 돌아누워 혼자 베개를 적셔도 본체만체하던 차가운 새신랑. 미끄러운 비포장 경사진 도로, 비 내리는 출근길에 하이힐을 신고 난감해하는 임산부 아내를 뒤에 둔 채 성큼성큼 긴 다리로 혼자 먼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남편. 동료나 친구들인 남의 결혼식에만 가면 왜 그리 서러운 눈물이 흐르던지.


 어려운 시골 농가 살림에서 콜드크림 마사지를 하고 오이를 얇게 저며 얼굴 위에 올려놓고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로서는 참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딱 50, 쉰 살이셨다.

 결혼을 하고 나니 어머니께 미안하더라는, 혼자 하기에부족한 효도를 내가 잘 도와줄 것 같아결혼했다라남편의 고백.

 "큰아아는 미국 놈이다. 지 마누라하고 지 새끼밖에 모른다." 노한 표정으로 나에게 푸념하시던 시어머님. 내 눈에는 남편이 말도 안 되는 마마보이로만 비치는데ᆢ.

 그 둘을 이해하고 품어 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나의 미성숙함. 그 문제는 우리 결혼 생활 내내 지속된 커다란 어둠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약 한 달 후, 남편의 외사촌 형님 부부를 찾아뵈었다.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과도하게 지출하신 부의금도 남편이 드리는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조심스럽게 되돌려 드렸다. 그분의 여동생인 외사촌 시누랑 동행한 걸음이었다. 식당과 카페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길어져 결국 형님 댁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밤늦게 헤어졌다.


 결혼 후 시댁 친척들로부터 너무나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그날도 어김없이 화제에 올랐다.

 "고모는 만규 하나 보고 살았지."

 어머님이 장남 아들을 가슴에 안은 빛나는 트로피로 평생 품고 사셨다는 말, 친척 누구나 다 쉽게 입에 올리는 이야기다.

 효도 콤플렉스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는 모범생, 섬세하고 예민한 남편에게는 버거운 짐이기도 하고 든든한 심리적 지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친정어머님의 나에 대한 헌신과 자랑이 나에게 무거운 의무도 되고 큰 힘도 되었듯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은 그냥 조용하고 성실하신 분이셨다. 농군과 결혼한 게 천추의 한이라고 한탄하시는 어머님 앞에서 아버님도 2남2녀 네 자녀들도 모두 꿀 먹은 벙어리로 침묵을 지켰다.


 오늘은 한 가지 사실이 덧붙여졌다. 남편과 함께 있었던 자리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다.

 "고모가 제수씨와 결혼하는 걸 반대했어요. 그때 고모가 아주 낙심하며 말합디다. '아아가 한 번도 내 말을 안 들은 적이 없는데 이번만은 내 말을 안 듣고 지 고집대로 한다.' "

 경남을 통틀어, 아니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으로는 뜨르르한 가문, 적어도 국회의원 집 딸 정도되는 규수를 며느리감으로 원하셨다는 것이다.

 참, 나 원 ᆢ.

 당연히 나는 그런 분위기조금도 휘둘리지 않았다. 불편했을 뿐이다. 끝까지 부모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섬겼지만 사랑하고 존경하기는 어려웠다.

 어머니께서도 차마 내놓고 나에게 그런 직설적인 표현을 하시지는 못했지만 에둘러 심통을 부리신 적은 많았다. 소통에 서투른 나는 뚱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혼을 앞두고 양가 어머님이 부산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다. 결혼날짜와 식장 등 구체적인 이야기가 거의 다 마무리된 시점에서 우리 어머니보다 열한 살 어리신 시어머님이 조금은 뻐기는 태도로 말씀하셨다.

 "우리 아아한테 좋은 데서 선이 많이 들어오요."

 그 자리에서 이 말이라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억울하셨던 것일까? 활달하고 딸 사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우리 어머니가 발끈하신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일로 두 분은 사돈끼리의 첫 만남에서 큰소리를 내셨고 감정이 상했고 우리 둘도 각자 자기 어머니 편을 들며 삐그덕거렸다. 신혼집으로 값싼 남의 집 아랫채 단칸방을 어린 우리끼리 구하러 다녀야 했던 처지에서.

 겉으로는 내가 상처를 입었으나 속으로는 남편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웃음 속에 지나간 추억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끝에 외사촌동서 형님이 결론을 내리셨다.   

 "고모님이 드센 며느리를 봤어야 하는데."

 시숙님도 한마디 보태셨다.

 "지난 일은 캐지 말고 앞 일은 땡기지 말고 지금을 잘 삽시다."


 현관 앞, 밤늦은 어두운 골목에서 80을 전후한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또 눈물을 쏟았다. 이런 장면에서 내 옆에 그가 없었던 일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새삼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황당하고 허허로웠다. 많이도 토라지고 삐지고 다투면서도 또 뜨겁게 화해하며 항상 옆에 있었던 사람.

 죽음 앞에서야 이제 간절한 마음으로 통회한다. 모든 것이 이해되고 수용된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정말 사랑했는데 정말 좋아했는데 왜 그리 서로에게 인색했는지, 왜 그리 힘든 상대가 되어 버렸는지, 왜 그리 귀한 시간을 아깝게 허비해 버렸는지 ᆢ.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선물처럼 다시 주어진다 해도 지금 고백하는 이 마음으로 한결같이 잘 해낼 자신은 없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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