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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05. 2023

 시어머님, 조 모니카 님

  인연

 "어머님, 오늘 영욱이 결혼식 잘 끝냈습니더."

 " 비는?"

 " 비가 와아예 (왜요)?"

 " 아침에 비 왔다 아이가."

 " 아아, 네에~.  아침에 잠깐 비가 와서 덕분에 공기도 좋고 날씨도 시원해서 더 좋았습니더."

 "노무혀이는?"

 "네~에~?"

 "노무혀이가 죽었다 아이가?"

 "그게 무슨 말입니꺼?"

 "와아(왜)? 사람들이 다아 그어(그곳에) 안 가나?"

 "ㆍㆍㆍㆍ"

 "소문카마 다르다 카데?"

 "뭐가예?"

 "신랑이 소문카마 다르다메?(소문하고 다르다면서?)"

 "ㆍㆍㆍㆍ"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오전 11시.

 방배동 성당에서 둘째가 3년여 사귀었던 예쁜 사윗감이랑 결혼식을 올렸다.

 한 달 전, 청첩장을 준비해서 고향 함안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당시 82세로 정정하신 편이었던 어머님은 마산에 사는 큰시누이 내외가 모시고 오기로 의논이 되었다.


 결혼식 당일 어머님과 시매부는 오시지 않고 부산, 마산에 사는 손아래 시누이 둘만 상경했다. 아무런 해명도 없었기에 의아했다. 누군가의 귀띔에 의하면 번듯하게 버스 한 대 대절해 보내어서 고향사람들에게 당신 체면을 살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안, 부산, 마산 다 해서 서울 결혼식에 참석할 친척들은 열 명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머님은 구경 다니는 것 좋아하시고 평소에도 일 년에 두세 번 이상은 매년 서울을 다녀가셨다. 동네에서 놀러 가면 당신만큼 잘 걷는 사람은 없다고 자랑하시며 눈치 없는 늙은이들이 옆에서 도와주는 젊은 사람들한테 꼭 매달려 붙어가느라 남을 힘들게 한다고 흉보곤 하셨다.

 집에서는 어머님이 잠깐 움직이려는 자세만 취해도 자식들이 바로 달려들어 부축해 드린다. 항상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어머님이 끙하고 신음소리를 내면 바로 반응하는 것에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남인 남편과 손아래 시누이 둘, 셋 다 그렇다. 남편보다 아홉 살 어린 막내시동생은 비교적 자유롭다.


 결혼식을 다 끝내고 손님접대도 마무리 짓고 신랑 신부도 신혼여행을 떠나보내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참석하지 않으신 어머님께 안부도 묻고 오늘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전화를 넣었다가 이런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 간 것이다.


 오전 11시 결혼식은 일정이 바쁘다. 새벽부터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6시에 신부는 신부 미용실로 출발하고 나는 예약해 둔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평소와는 다른 화장을 하고 한복을 챙기고 인륜지대사라는 큰일을 준비하느라 긴장되고 바쁘다. 이른 아침에는 비까지 내렸지만 해가 뜨자 날씨는 맑게 개었다. 예상보다 조금 늦어진 준비를 마치고 급한 마음으로 예식장인 방배동 성당으로 향했다. 그 간, 타고 가던 승용차 안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 뉴스 방송을 들었다.

 그날 새벽 봉화 마을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안타깝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봄이 무르익어 일 년 중 가장 결혼식이 많은 5월 하순의 토요일 아침, 딸의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이런 소식을 들으니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안타까움과 개운치 않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지만 바쁜 일정에 쫓기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혼식은 양가의 많은 축하객들의 풍성한 축복을 받으며 가톨릭 전례로 기쁘고 고맙게 잘 진행되었다. 영산홍 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5월의 방배성당 성모동산은 혼배사진 촬영의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집과 마찬가지로 온가족이 가톨릭 신자인 사돈댁이 교적을 두고 있는 본당이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뷔페 식사 준비도 양가에서 400명씩 800인 분을 주문했는데 사돈댁에서 450분, 우리 쪽에서 350분이 점심을 들고 가셔서 준비한 음식이 딱 맞아떨어져 신기하다고 업체에서 양가에 떡을 한 바구니씩 선물로 주었다.


 딸은 말씀 봉사, 사위는 베이스 기타 찬양 봉사로 가톨릭 청년 성서 그룹에서 만난 인연인지라 주례는 청년 성서 그룹 지도 신부님이신 홍인식 마티아 신부님께서 맡아 주셨다. 축하객들도 신자분들이 많았다. 신부님은 영성체 밀떡을 두 번이나 더 가득가득 채워 오셨다. 결혼식에서 이렇게 많은 성체 분배는 처음 해 보신다며 흐뭇해하셨다 한다.


 29세, 30세, 꽃다운 나이. 딱 보기 좋은 적령기 신랑 신부, 예쁜 한 쌍이었다. 딸은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GS 칼텍스 영업기획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사위는 서울대 전기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김앤장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주례를 맡으신 홍신부님께서는 신부님답게 신랑 신부의 이런 세속적인 인적사항은 일절 언급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말씀 안에서 성가정 이루기만을 당부하셨다.

 그것이 어머니 귀에 누구로부터 어떤 내용으로 즉시 전달되었는지 신랑이 소문하고는 다르다는 뜬금없는 말을 전후좌우 아무 설명도 없이 전화에다 대고 툭툭 던지셨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주고받은 말들의 내용도 그렇고 그 속에 담긴 정서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소문이라는 말도 많이 거슬렸다. 얼떨떨하게 제대로 답변도 못하고 정신없이 전화를 끊고 나니 참으로 씁쓸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하지만 누구 한 명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다. 남의 편인 남편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들으며 어머니 입장만을 변호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편견과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오랜 시간 구축해 온 그의 견고한 진지를 결코 허물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린 우리 아이들에게는 차마 말할 내용이 못 되었다.

 '왜 이러실까? 도대체 왜 이러실까?'

 손녀 결혼식에는 당일까지 한마디 소식도 없이 오시지도 않고 무슨 생각으로 왜 그런 황당한 말씀들을 던지실까?

 뭐가 그리 못마땅하신지, 어머니의 어떤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 드려야 하는지?'

 혼자 많이 울었다.


 언젠가 사촌동서형님이 말씀하셨다.

 "동시야, 나는 작은어무이가 니를 메느리 삼을 줄은 몰랐다. 니 앞에 데럼(도련님)이 사귀던 부산 아가씨가 있었는데 생선도 한 박스씩 말려서 들고 오고 했다. 작은어무이가 자랑 되게 마이 했다. 나는 그 아가씨 메느리 볼 줄 알았다."

 '그으~차암  ~~!!'

 무슨 이유에선지 남편이 먼저 그 여자에게 결별을 선언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 나를 만났고.


 1988년 6월 결혼 11년째, 막내아들 셋째가 태어났고 가을에 어머니의 환갑이 다가왔다. 무슨 선물을 드릴까? 궁리하다 어머니께 의논드렸다.

 "어머니, 금 한 냥, 열 돈 짜리 금목걸이 하나 해 드릴까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바로 날아왔다.

 "내 죽으면 다 니 꺼 될 낀데  할라꼬?"

 결국 금 한 냥 값에 해당되는 현금 65만 원을 드리고 말았다. 당시 대기업 부장이었던 남편의 월급 한 달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어머니는 무얼 하셨을까? 그 후로도 어머님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더 사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큰시누가 어머님 목걸이를 해 드렸고 어머님 사후 그 목걸이는 큰시누가 가져갔다.


 신혼시절 정성 들인 손편지와 선물을 아버님 어머님께 부쳐 드렸다. 감동하여 두 분이 눈물을 흘리시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더라는 말을 친척에게서 전해 들었다. 자주 찾아뵈었고 우리 집으로 나들이를 다녀가시는 일도 적지 않았다.

 어머님 사후 시누들이 어머님의 유품을 정리했다. 수십 년  한 번도 빠짐없이 통장에 매달 찍혀 있는 남편 이름의 송금내역보고 둘이서 입을 모았다고 한다.

 "불쌍한 오빠~~."


 어머님의 나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마음은 임종 직전까지도 이어졌다.

 2011년 초겨울, 84세인 어머님은 오랜 기간 지녀 온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이 발병하여 병원 입퇴원을 몇 번 반복하시다가 결국 투석으로 결정되었다. 부산 사는 시누이의 주선으로 투석 시설이 갖추어진 투석 전문 요양 병원에 입원하셨다. 부산 해운대 쪽 장산역에 있는 새생명요양병원. 그곳에서 만 4년 반을 머무셨다.

 가까이 사는 시누 둘이 정성껏 어머님을 보살폈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부산엘 내려갔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일 년에 대여섯 번 내려갔다. 의대 공부에 바쁜 아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대문 사진은 그때 아들이 찍은 해운대 밤바다이다. 하이아트 호텔 야외 테라스에서 생맥주도 한 잔씩 나눈 밤.

 대부분 함께 갔지만 남편 혼자 가기도 하고 나 혼자 갈 때도 있었다. 승용차를 몰고 가기도 하고 고속버스나 기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편도 5시간 거리, 1박 2일 일정이었다.  많이도 오르내렸다.


 둘이 갈 때면 짬을 내어 범어사도 둘러보고 몰라보게 변한 모교 부산대학교도 방문해 보고 해운대 백사장도 걸어 보고 동백섬 조선호텔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왜 호텔에 숙박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숙박은 늘 대중 온천탕을 갖춘 송도각을 이용했다. 해운대 백사장 입구에 있었다. 1박에 6만 원. 우리들은 그쪽이 더 마음 편했다. 아침에는 근처 맛집 금수복국에서 맛있는 복어국도 먹으며 이틀 동안 두 번 어머니를 뵙고 올라오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승용차로 갈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송정 해안도로 드라이브랑 외식도 즐겼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보름 전인 2015년 5월 8일 어버이날, 그날도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찾아뵈었다. 여느 다른 해처럼 어버이날에는 어머님을 모시고 시누이들과 함께 함안 본가로 가서 2,3일 묵다 올 계획이었다. 병원측에서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틀에 한 번씩 하는 투석을 거르는 것도 그렇고 밖에서 조심하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섭취하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병실에 들어가 어머니 침대 옆으로 다가가니 얕게 주무시고 계셨다. 조금 기다리다 조용히 손을 잡으면서 우리가 왔다고 말씀드렸다.

 갑자기 어머님이 내 손을 훽 뿌리치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우며 눈을 꽉 감아 버리신다. 그리고 화난 음성으로 내뱉으셨다.

 "너거 얼굴 안 본다. 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계속 말을 붙였지만 완강하게 손을 휘저으며 가라고만 하셨다. 난감해진 남편은 병실 밖으로 휙 나가 버리고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손발을 주물러 드리며 혼자서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해 드렸다.

 잠시 후, 꼭 감고 있던 어머니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속으로 '이제 되었구나.' 생각했다.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으시더니 분에 찬 한마디를 던지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오데 있노?"

 "어머니, 무슨 일입니꺼?"

 "내가 병원에서 너무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아아 집에 갔는데 아아가 현관문을 안 열어 준다 아이가. 그라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안 하고 병원 사람들 말만 듣고 있더라."


 이틀에 한 번씩 치러야 하는 투석 치료를 어머님은 그 병원 최고 수간호사가 아니면 받지 않으신다고 했다. 바늘을 꽂는 솜씨가 다르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수간호사가 휴가 중이거나 해당 근무일이 아니어서 투석 거부 기간이 길어지면 병원 측에서는 수면제를 투여해서 치료하는 식으로 강압적인 투석을 시행했다. 그럴 때면 병원에서 보호자인 남편에게 전화가 오곤 했는데 심약한 남편은 무척 힘들어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알아서 좀 해 달라는 답변을 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그럴 리가 있습니꺼? 언제 오셨습니꺼? 뭐 타고 오셨습니꺼? 왜 미리 연락을 안 했습니꺼?"

 "택시 타고 갔다."

 입원 중인 89세 할머니 환자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혼자 택시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아이고, 아범이 몰랐던 모양입니더. 올라오시면 미리 연락을 하시지 그랬습니꺼?"

 "아아가 그럴 사람이 아인데 누가 뒤에서 시키는 사람이 있다."

 어머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범이 그럴 사람이 아인데 누가 그렇게 시키지예? 어머니, 잘 좀 생각해 보이소. 저도 되게 궁금합니더."


 어머니와 나는 서로 두 눈을 맞추고 마주 바라보았다. 80대의 강한 시어머니의 눈길 앞에서 60대의 며느리인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2,3초, 그렇게 서로 빤히 눈을 맞추다가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암만 생각해 바도 읎~~따~!"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어머니가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시누이들은 몇 년 전부터 계속 어머님이 치매라고 말하며 민망한 언행들을 덮어왔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

 "읎~~따~!"

라고 선언하시는 그 한 마디로

  "그 사람은 바로 너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89세 투석환자 어머니.

 당신 머리맡에 놓아둔 돈바구니에서 매일 어떤 여자가 500원씩 돈을 훔쳐 가서는 서울에다 집을 장만했다고도 하셨다.

 다음날 어머님이 원하시는 대로 치킨을 사들고 다시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시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오빠 뒤에서 누가 시키는 사람. 작은시누이가 바로 찍었다.

 "딱, 바로 언니네요. 뭐~~"

 어머니의 심정을 제일 잘 아는 딸들의 결론이다.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너무나 당연시했다. 강한 어머니에게 부딪칠 내적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그로부터 2주일 후인 2015년 5월 23일, 음력 4월 6일, 어머니는 비교적 편안하게 네 자녀와 큰사위 작은며느리, 여섯 명의 자손이 지켜보는 가운데 4년 반 동안 계셨던 병원에서 89세로 임종을 맞으셨다. 기저귀를 찬 연년생 두 손주가 있는 둘째네와 우리가 살림을 합친 바로 다음날이었다.

 정중한 장례 절차를 거쳐 20여 년 전 이미 준비해 놓았던 가묘, 13년 전 아버님을 모신 바로 옆, 시골집 앞산, 햇볕 좋고 전망 좋은 무덤터에 묻히셨다.

 10대에 시집와서 70여 년을 살아오신 낯익은 땅, 당신이 건강하실 때부터 보살피고 가꾸어 오신 음택에서 평화로운 영면에 들어가셨다.


 어머님, 조소의 모니카 님.

 이승에서 겪은 모든 희로애락의 수고로움과 생로병사의 고통 다 떨쳐버리시고 사랑과 평화만이 가득한 아버지 하느님의 품 천상낙원에서 영원복락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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