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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25. 2023

다시 올 결심

  사랑하는 함안

 함안에서의 마지막 날,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벌초를 하는 날이다.

 일찍 눈을 뜬 희부염한 새벽. 준비해 온 수영복을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본가가 있는 춘곡을 향해 길을 잡았다. 나중에 함께 승용차로 올라갈 길이지만 혼자 한번 걸어 보고 싶었다. 읍내에서 도보로 1시간 길이다. 함안살이 2년 동안 숱하게도 많이 걸어 다녔던 길.

 승용차도 마을버스도 없었던 70년대 신혼 시절에도 가끔은 택시를 대절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 다녔다. 지금보다 훨씬 험하구불구불 길었던 비포장도로 시골길을 정장 차려입고 뾰족구두 신고도 힘든 줄을 몰랐다. 20대의 풋풋했던 시절, 남편 한 명만을 믿고 의지하면함께 걸어 다녔던 길이다.


 다리를 건너 관동 마을에 들어섰다. 오리명가 식당 간판에는 새로울 신 자가 하나 더 붙었다. 오리명가. 우리가 함안으로 내려온 첫날, 기다리고 있었던 큰시누네와 맨 처음 함께 식사를 했던 곳이다. 청 더웠던 2018년 7월 17일.


 원동마을, 도움마을, 괘안, 신암, 혈곡 ᆢ, 낯익은 지명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어둠이 물러나는 대지 위로 알알이 영글어가는 벼들의 구수한 노란색 조금씩 얼굴을 드러낸다.

 안개에 덮여 인적 없이 텅 빈 새벽길은 끝간 데 없이 길게 이어진다. 얼마를 걸었을까?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본가가 있는 춘곡 입구가 나타날 것이다.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이런 시간에 이곳을 나 혼자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또 무슨 인사를 듣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가슴 한켠이 싸아해져 왔다. 발걸음을 돌렸다.


 긴 둑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저 끝에 종합운동장이 나오고 수영장이 나온다. 철 따라 메리골드와 유채꽃으로 예쁘게 단장했던 둑길이 나비바늘꽃이라는 이색적인 꽃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있다. 이미 깊이 뿌리를 내려 단단히 터를 잡은 듯  연분홍 아련한 꽃길이 길고 풍성하이어졌다. 장관이었다.


 종합운동장이 나타났다. 둑길에서 내려 수영장으로 들어섰다. 2년간 기초반에서 헥헥거리며 수영강습을 받았던 곳이다. 25m 레인을 한 번만에 못 가고 숨이 차 중간에서 멈춰 서곤 했지. 마침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 다섯 레인이 모두 열려 있었다.

 수영장을 나오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모텔까지 돌아오는 동안 등에 멘 배낭과 바짓단이 흠씬 다 젖어 버렸다.

 전화가 왔다. 나를 태우고 함께 춘곡으로 갈 시매부시다. 친구들과의 여행이 잡혀 있어서 못 온다고 했던 작은시누이도 여행을 취소하고 부산에서 온다고 했다. 이틀간 머문 모텔과 안녕이다.


 빗속을 5분쯤 달린 후 본가 가까이 있는 사촌집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벌초를 나갔고 집에는 사촌동서들 세 명이 남아 있었다. 서로 가슴속에 있는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한다. 어설픈 미소를 띠며 겉도는 대화들을 나눈다. 나는 잠깐 헛간 뒤에서 혼자 서성였다.

 쏟아지는 폭우로 흠뻑 젖은 사촌들이 벌초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을 씻고 옷들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갔다. 술을 한 잔씩 나누고 오늘의 고생담과 그동안의 안부들을 나누며 뜨끈한 감자탕을 먹었다. 극구 사양하는 식사비 계산을 끝내었다. 어느새 옆에 서 있던 큰시누이가 점심값에 해당되는 돈 봉투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도저히 돌려받을 기세가 아니었다.

 식당에서 사촌들과 헤어져 부모님 산소로 갔다. 빗속에서 급히 벌초를 하느라 어지러이 잘린 풀들이 어수선하게 봉분 위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비에 푹 젖어 붙어 있어 어떻게 손을  수가 없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무덤 앞에 나란히 선 네 명 모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눈물에 잠겼다. 작은시누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아부지 야속합니더."

 오빠를 너무 일찍 데려갔다는 뒷말은 차마 잇지 못하고 입 속으로 삼켰다. 아버님은 21년 전 80세로, 어머님은 8년 전 89세로 이곳에 잠드셨다.

 당신은 화장한 뼛가루를 이곳 아버지 어머니 묘 아래 아무 흔적 없이 묻히겠다던 남편은 72세로 이곳과는 거리가 먼 강화 봉안당에 모셔졌다. 아이들과 내가 사는 서울과 가까운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바로 그 옆에는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언젠가는 아버님 어머님 묘를 정리해야 한다. 나는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고3 때 세상을 떠났다는 남편의 남동생 묘도 근처에 있다. 세 분의 묘를 정리하는 일은 나의 세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매매로 이제는 남의 집이 된 본가를 지나쳤다. 해대 졸업생인 남편이 결혼 전 외항선 1항사로 일해 부모님께 장만해 드린 크고 넓은 집이다. 남편은 그곳에서 살아 보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수십 년 편히 지내셨던 곳, 우리가 신혼 첫날밤을 보냈던 곳, 지난 함안살이 2년간 거의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집이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차에서 내려 자세히 둘러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쉽게도 그냥 스쳐 지나왔다. 언젠가는 천천히 다시 와 보고 싶다. 텃밭에 풀도 다시 한번 뽑아 보고 싶다.


 우리 집과 텃밭이 나란히 같이 붙어 있는 윗집의 아주머니께서도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우리가 떠나올 때 집간장은 있냐고 물으셨는데ᆢ.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드나들겠지만 빈 집이 하나 더 늘었다.


 마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예매한 버스표 시간을 기다리며 차를 마셨다.

 "우리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 만나요."

 작은시누가 말했다.

 "네에, 그래요."

 나도 흔쾌히 대답했다.

 일흔네 살인 시매부께서 계속 운전을 맡아 주실 것이고 건강이 좋지 않은 큰시누는 잘 회복할 것이다.


 서울행 버스는 시간에 맞추어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애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두 시누의 쓸쓸한 모습이 핸드폰 카메라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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