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여행을 다녀온 2주 후인 12월 19일, 뒤풀이 모임을 가졌다. 꽤 많이 남은 공동 경비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못다 한 회포를 나눈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장욱진 화백 그림 전시회에도 같이 들러 보기로 했다.
안목 있는 E가 예약한 일식집 룸에서 넷이 우아한 점심을 즐겼다. 함께해 준 것에 고마워하고 여행을 주관한 E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나주읍성 2박 3일 살아 보기.
지방 경제를 살리는 정책 중의 하나로 관광문화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문체부 살아보기 국가사업의 일환이었다.
Ktx로 용산에서 2시간 5분 만에 도착한 나주.
먼저 체크인 센터인 나주 情味笑에 들러 이 여행 상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바로 인력거 투어가 시작되었다. 문화 해설사 한 분이 운전하는 전동 인력거 4인용 뒷자리에 우리 넷이 옹기종기 올라탔다. 동네 주민인 문화 해설사 분의 나주 사랑, 나주 자랑이 대단했다.
우리나라 도시 중 동서남북 사대문이 다 있는 곳은 서울과 나주 두 곳뿐이며 우리나라 성씨 257개 본관 3435개 중 나 주에 본향을 둔 성씨가 62개나 된다고 했다.
기름지고 넓은 곡창지대인지라 日帝 수탈의 중심지가 되었고 창씨개명, 단발령 등에 거세게 반발하며 광주 학생 운동의 발원지가 되다 보니 일본이 도청을 광주로 옮기면서부터 나주가 퇴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빌레라 문화관을 시작으로 124년 역사를 지닌 나주 초등학교, 우리나라 통조림 산업의 출발지인 하남산업터 등에 얽힌 역사를 구수한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지금은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남산업은 당시 하루에 2~300마리의 소를 도축하여 통조림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반출한 곳이다.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이라는 소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꾼들이 임금 대신 받는 소 도축 부산물을 요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유명한 나주 곰탕.
이름만 황포돛배인 기름 모터 나룻배를 타고 50분 영산강 뱃길도 누볐다. 수많은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중요한 이동로이다 보니 영산강 황포돛대 선착장에는 바다가 아닌 강에 있는 유일한 등대, 영산포 등대가 있다.
카페 마중 3917을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은 문화산업에 대한 원대한 꿈을 펼쳐 보였다.
이틀간 묵었던 한옥숙소의 최신식 숙박 시설은 편리했고 70대 감 농사꾼 사장님의 세심한 보살핌은 따뜻했다.
의미 있고 즐거웠던 나주 읍성 살아 보기 2박 3일을 마무리 지었다. 남은 경비 5만여 원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기로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가져온 승용차로 인사동 옛찻집엘 들러 단팥죽을 맛보고 대추차를 마셨다.
도보로 도착한 덕수궁 현대미술관.
가장 진지한 고백 : 장욱진 회고전
2023ㆍ09ㆍ14 ~ 2024ㆍ02ㆍ12
1관부터 4관까지, 약 60년 간 꾸준히 그려온 250점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화가 이중섭.
1917년부터 1990년 73세까지 끊임없는 열정으로 제자들을 키우고 폭넓은 작품들을 남긴 장욱진 화백의 여유롭고 안정된 작품 세계에 비해 1916년 1년 차이로 먼저 태어나 1956년 40세로 세상을 떠난 이중섭의 빈한하고 안타까웠던 삶이 계속 떠올랐다.
서귀포 이중섭 기념관에서 보았던 그 좁고 남루한 방 한 칸과 천장에 달려 있던 벌거벗은 백열등 하나.
두 분이 함께 이렇게 넉넉한 작품 생활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림들을 뒤로하고 덕수궁을 나왔다. 짧은 겨울 낮이 지나가고 바깥은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빛 조형물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시커먼 어둠을 몰아내고 찬란한 빛을 선사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나는 광화문 전철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안녕, 잘 가, 고마웠어, 잘 지내."
손을 흔들고 인사를 주고받고 몸을 돌리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모든 낯익은 건물들이 통증으로 다가왔다.
1978년 대연각 건물에서 시작하여 대우빌딩, 교보빌딩, 남산 sk빌딩, 2018년 2월 마지막으로 근무한 남대문 우리빌딩까지 남편이 40년 간 다녔던 일터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공간이다.
힐튼 호텔 헬스센터, 플라자 호텔 로비, 삼성 본관 라 깐띠나 이탈리안 레스토랑, 포시즌 호텔 연회장, 조선호텔 베이커리 커피숍, 교보문고 서점 ᆢ.
둘이서 또는 가족이 모두 함께 종종 드나들었던 공간들이 지나간 시간들을 이야기하며 시야를 흐려 왔다. 고개를 들어 건물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생각 없이 찾아온 이 공간에서 이런 아픔들을 만날 줄이야.
계단을 내려 들어선 전철역 지하도 안, 낯선 사람들의 밀려오는 물결 속에 파묻혀 그냥 하염없이 울었다.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 언뜻 들어선 어느 낯익은 공간에서 이리 싸아한 통증을 만나야 할까?
눈길 가는 곳곳에 그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긴 다리로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반듯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