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와 E의 대학 동창 M, J 그리고 나, 넷이 2박 3일의 나주여행길에 올랐다.
2023년 12월 5일 ~ 7일
나주 읍성 살아보기 4U
찬란한 역사문화, 예향의 생활 문화, 천혜의 자연생태, 군침 도는 남도 별미.
여행이 끝난 날, 셋은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나주에 남았다. 남편의 외사촌 시숙님과 동서 형님을 찾아뵙기 위해서다. 한 달 전 갑자기 서울에서 나주로 옮겨 오셨다. 코로나에 전염되어 중환자 병동 음압실에서 사투를 벌이시다 나주 막내딸네 집으로 모셔졌고 내친김에 이곳에 집을 구해 놓으셨다고 한다. 여행 일정 마지막 장소인 빛가람 호수 전망대가 마침 나주 혁신도시에 있는 아파트와 가까운 거리였다.
무한 긍정이신 시숙님의 호방한 성격과 살림솜씨 뛰어나신 동서 형님의 뜨거운 헌신으로 이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잘 넘기셨다. 세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과 뜨거운 가족애도 단단히 한몫했다. 멀리 미국에서 두 자녀가 들어와 부모님을 지켰고 세 남매가 뜻을 모아 이곳 나주 막내딸네 집으로 모셨다. 지금은 넉 달 전 서울에서 찾아뵈었던 때보다 두 분 모두 더 건강해 보였다.
발병 초기의 병원생활을 지켜보았던 시숙님의 여동생, 외사촌 시누이도 밤늦게 방문하여 깜짝 놀랐다. 오빠가 이렇게 회복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이번엔 정말 가시는 줄 알았다며 지금 모습에 감탄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된다. 여든을 눈앞에 둔 동서 형님도 이제 겨우 한숨 돌리신 것 같았다. 서울에서의 모든 일상을 접고 떠나온 낯선 곳, 높은 고층 아파트의 12층 창문가에서 멍 때리는 시간이 많다는 말씀을 하셨다.
특별히 주문한 회를 비롯하여 정성껏 차려 주시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긴긴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제일 먼저 꿈나라로 갔다.
이튿날 아침, 부지런하신 형님은 냉장고를 열고 큰 플라스틱 통에 하나 가득 담긴 야채로 주스를 만드셨다. 사과, 양배추, 당근으로 만든 ACC 주스 넉 잔. 씻고 다듬고 보관하신 형님의 노고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직접 빚으신 만두를 넣은 뜨거운 떡국과 손수 담그신 맛있게 익은 싱싱한 김치. 건강한 아침상을 물리고 다 같이 산책에 나섰다.
"제수씨, 조교가 삼청대 교육 저리 가라입니다. 자세를 똑바로 해라, 좀 더 빨리 걸어라, 좀 더 오래 걸어라, 장난이 아닙니다. 나가기 싫어도 무서워서 나갑니다."
시숙님은 웃으며 너스레를 떠셨지만 형님은 긴장을 풀지 않으셨다. 신을 찾아 바로 신기고 지팡이를 챙겨 드렸다.
대단지 고층 신축 아파트를 빙 둘러싼 산책길은 옆으로 넓게 펼쳐진 배밭을 끼고 약간 경사를 이루며 오르락내리락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 있었다. 겨울바람은 꽤나 차갑게 불고 사람들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누이와 시숙님, 두 남매분은 뒤로 약간 처지고 형님과 나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좀 더 멀리까지 앞서서 걸었다.
지난날 고생한 이야기, 잘 자란 아이들에 대한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 현재 낯선 곳에서의 갑갑한 일상, 밀폐된 아파트의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된 과년한 딸의 바쁜 일상에 대한 걱정, 열심히 게으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잘 이끌어 나가야겠다는 결심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옆으로는 야트막한 겨울 정원이 길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무성했던 녹색 나뭇잎들과 각양각색 철 따라 피어났던 알록달록 고운 유채색 꽃잎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색과 짙은 갈색, 회색의 무채색들로 덮여 있는 앙상한 겨울 정원.
저만치 형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딱 한 송이 조그마한 붉은 영산홍꽃이 눈에 띄었다. 조그만 얼굴을 조심스레 내밀고 있는 수줍은 듯 고운 자태. 매일 걷는 산책길에서 유독 한 송이 홀로 피어 있는 이 꽃을 계속 눈여겨 보신다고. 찬바람 부는 넓은 공간에 딱 한 점 붉은 영산홍꽃 한 송이. 한참 그 앞에 멈추어 서 있는 나이 든 여자 둘.
스산한 겨울바람 속에 우리는 모자와 목도리, 두툼한 방한복으로 온몸을 꽁꽁 둘러쌌지만 그 작은 꽃 한 송이 달랑 메마른 갈색 가지 끝에 외로이 달려 있었다. 무성한 초록잎들의 든든한 호위도 없이 무슨 사연을 저리 꽃 피워 낸 것일까?
순간 차가운 공기 속에 봄날 같은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노랑나비 한 마리. 평범한 연노랑이 아닌 건강한 진노랑의 단단해 보이는 나비 한 마리, 처음 보는 선명하고도 예쁜 색깔의 나비 한 마리가 어디선가 찾아와 이리저리 한가하게 옆을 날아다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걸었다.
"얘, 너 참 예쁘네, 참 곱다."
몇 번 이리저리 재빠른 곡선을 그으며 경쾌한 날갯짓을 펼치다 한 순간 제 갈 길로 방향을 잡는 나비.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잘 가, 안녕."
무심코 돌아서 몇 걸음 옮기다 다시 몸을 돌려 눈으로 나비 뒤를 좇았다. 중간 크기의 선명하고 짙은 노란색의 예쁘고 건강한 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한가한 곡선을 그으며 저 멀리 시야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아침, 아스라히 먼, 끝을 알 수 없는 파아란 하늘가로.
너는 이제
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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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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