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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떠나가고 찾아오는 ᆢ

by 서무아

결혼 6년 차에 접어든 아들네 집. 이곳에서 처음으로 잠을 자는 숙박 첫날밤이다. 또 한 명 며칠째 첫날밤을 지내는 동반자가 있다. 2년 1개월 된 세 살배기 어린 손녀다. 난생처음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첫날밤들을 사흘째 보내고 있다. 이틀 전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 신생아 동생, 세 가족은 엄마가 입원 중인 병원에 있고 누나가 된 어린 손녀는 집에서 나와 함께 낯선 밤을 지내고 있다. 주일인데도 귀가를 취소하고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낯가림이 심하고 엄마 껌딱지인 섬세한 손녀, 아직은 어린 아기인 여린 손녀가 엄마 아빠가 없는 힘든 시간을 그래도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자주 찾아와 세심하게 잘 돌봐 주시는 안사돈, 외할머니 대신 오늘은 내가 2박 3일 취침 당번이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젊은 아들이 갓 태어난 조그마한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고 다정히 내려다보며 눈웃음 짓고 있는 카톡방 사진을 본다. 그 옆에서는 이제 막 힘든 산고를 치른 며느리가 큰일을 해 낸 안도감으로 함께 미소 머금고 누워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꾹 감고 있는 여린 생명은 선하고 어질어 보인다. 의젓하고 믿음직해 보인다.

갓 태어난 동생과 누나가 된 손녀, 수고한 며느리와 아들. 한 가족의 테두리 안이 그득해졌다.


세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던 날들이 아련한 기억 저 너머의 추억으로 다가온다. 방긋방긋 웃던 어여쁜 얼굴들, 또록또록 여물어 가던 귀여운 얼굴들, 의젓하게 자신만의 생의 틀을 잡아가던 믿음직한 얼굴들, 결혼을 하고 둘이 한 쌍이 되어 성실하게 가정을 가꾸어 가는 고마운 얼굴들.

이제 드디어 그들 세 쌍에게서 여섯 번째 손주가 탄생하였다.

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오후 2시 5분, 서울성모병원.


세 아이들이 차례차례 태어나며 식구가 하나 둘 늘어가는 가족확장기의 한복판에서 내성적이고 책임감 강한 K장남,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인 나는 정작 육아의 전쟁터에 던져져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 다가오는 일상의 가사들을 감당해 내기 바빴다. 남편은 사랑스러운 뿌듯함과 가장으로서의 묵직한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기뻐하기 전에 힘들어하지는 않았을까?

네 식구의 가장이 된 30대의 아들을 보며 고단했을 남편의 청춘을 떠올려 본다.


세 아이들을 얼르고 달래고 훈육하고 운동이나 자전거를 가르치고 입시와 취업, 결혼을 뒷바라지하며 웃기도 하고 가슴 졸이기도 했던 긴 시간들이 저 너머 오래된 과거 속에서 아득하다.


11월 11일, 보름 전에는 며느리의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88세. 2년 전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 독립된 생활을 잘해 오시던 중 암진단을 받으셨다. 3개월 전 일이다. 의사는 잔여수명을 3개월로 예측했다. 병원 치료를 거부하시는 할머니의 뜻을 존중하여 많이 힘들 때면 잠깐씩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다가 집에서 임종하셨다. 5년 전 외손녀 결혼식 때 정갈하고 맛나게 직접 담그신 배추김치 큰 통 하나를 외손녀 혼수 선물로 보내주신 분이다. 당시 이미 80을 넘어선 연세셨는데ᆢ.


아들로부터 부음을 전해 듣고 딸 둘과 함께 서둘러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우리를 맞이하시는 안사돈의 눈이 금세 빨갛게 물든다.

"자식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는데ᆢ."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 외손녀와 그 외손녀를 돌봐 줘야 할 딸이 당신을 돌보느라 더 힘들어지는 것을 걱정하셨다는 말씀이다.


만삭인 며느리가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는 어린 딸을 지켜보며 말했다. "할머니도 아기였던 때가 있었다는 게 슬퍼요."

"집에서 임종하신 아버님을 뵀기 때문에 할머니도 집에서 임종하실 수 있었어요."

끝까지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저어해 오신 사돈 어르신. 평생 믿고 의지했던 아버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고통 없는 영원 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갓난쟁이 아가, 손주는 뿌돌이라는 태명을 졸업하고 정식 이름을 얻었다. 여러 생각들이 오간 끝에 아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낸 항렬자 淵에다 남편 이름 중 한 글자를 넣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살아생전 얼굴은 만나 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기뻐할 할아버지이니까.

이제 막 태어난 손주도 누구보다 좋아할 할아버지니까.


네 명의 외손주와 두 명의 친손주를 둔 다복한 할아버지, 남편. 몸은 이 땅에서 함께하지 못하지만 영혼은 훨씬 더 자유롭고 사랑만이 가득한 영적 존재가 되어 활짝 웃는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 주리라 믿고 바란다.


의자

조병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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