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은 클래식
얼마만인가?
김용배 예술의 전당 사장님의 격조 높은 해설을 곁들인 클래식 음악회에 다시 오게 된 것이. 높은 인품이 베어나는 맑은 얼굴을 대하고 따뜻하고 깊은 목소리를 또다시 듣게 된 일이.
속삭이듯 감미롭게 들려주는 한마디 한 마디 해설이 처음 듣는 경이로운 내용과 정감 있는 표현으로 부드러운 음성에 실려 귓속으로 가슴속으로 쏙쏙 파고든다.
팸플릿에는 콘서트 가이드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다.
저녁 시간에만 열리는 연주회를 한 달에 한 번, 오전 시간에 마련하여 전업주부들로 콘서트홀을 꽉 메우던 초창기의 파격적이었던 기획.
전문가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친절한 해설, 정선된 연주곡들이 지극히 아마추어 수준인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행복하고 달콤한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2004년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취임하여 지금까지 그 일과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으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23년 11월 24일 금 오전 11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김용배 님의 해설이 곁들인 클래식 음악회에 초대되었다.
오펜바흐 천국과 지옥 서곡
로타 첼로협주곡 제2번 G장조
첼로 송영훈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d단조 Op.22
바이올린 크리스틴 서현 림
라벨 볼레로
귀족이나 왕족들만이 즐기는 오페라는 형식과 구성에 충실한 반면 대중을 겨냥한 작은 오페라라는 뜻의 오페레타는 자유롭고 풍자적인 내용이 다루어진다는 해설 뒤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KT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지휘 백윤학
그런데 지휘자가 왜 저리 행복해 보이지? 음악에 심취하여 무아지경에 빠지는 지휘자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날렵한 몸매로 저렇게 통통 튀며 즐기는 분은 처음이다. 캉캉곡이 나올 때는 좁은 지휘대 위에서 본인이 직접 캉캉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앞에 앉아 연주에 몰입해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두를 아름다운 춤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 같았다. 열심히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하여.
이만치 떨어진 관중석에 앉아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피어오르는 웃음꽃과 함께 초대된 그 세계로 몰입되어 갔다.
마지막 곡인 볼레로 연주를 앞두고 김용배 사장이 덧붙였다. 선정된 이 곡을 보고 백윤학 지휘자를 떠올렸다고. 볼레로는 두 개의 똑같은 주제곡을 악기마다 번갈아 가며 연주한다. 15분 간 이어지는 연주에서 속도와 음률은 변함없이 똑같은데 크기가 조금씩 일정한 비율로 높아져야 한다. 여러분이 잘 지켜보아 달라. 다른 악기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연주되는 작은북 주자의 손 높이가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미미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높이가 높아지며 마지막에는 최고조에 달한다. 서울대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 백윤학 씨의 치밀한 이과적 지휘 역량이 이 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하기에 최적격이라고 생각한다.
김용배 사장과 백윤학 지휘자에게로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과연 빈틈없이 이어지는 15분 간의 연주. 모두들 숨을 죽였고 통통 뛰며 캉캉춤을 추던 지휘자는 한껏 진지하고 세심한 리더로 변신했다.
해설과 함께 듣는 클래식은 훨씬 더 친근하고 쉽게 청중들을 깊고 황홀한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다.
매월 3금, 대학 동창 일곱 명의 모임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옆으로 다가온 Y가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다음 금요일 시간 되니? 네가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줘서 고마워. 음악회 티켓이 있는데 같이 시간 보냈으면 좋겠다."
Y의 아들이 근무하는 KT에서 매달 가족 음악회 형식으로 초대장이 발급되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은 아들이나 남편과 동행하는데 이달에는 나를 초대한 것이다. Y의 남편이 했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ㅡ이번 연주곡들이 경쾌해서 내 울적한 기분을 풀어주는 데 도움 될 것 같다고.ㅡ
남편끼리도 서로 인사를 트고 지내온 사이다.
음악회에 오기 전에 미리 연주곡을 들어 보고 온다는 친구의 말대로 유튜브를 통해 미리 그 곡들을 들어보는 준비 마음도 배웠다.
음악회가 끝나고 콘서트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 모차르트로 갔다. 가격이 꽤 센 만큼 음식은 고급스럽고 맛있다. 음악회 초대에 대한 감사로 계산을 하려 하니 Y가 황급히 나서며 내 앞을 가로막는다.
"오늘은 풀코스로 내가 담당할게."
풀코스로 눈과 귀와 입을 행복하게 한 오늘, 그래도 많이 쓸쓸하다.
여름 저녁, 남편의 승용차에 손주들을 태워 와 잔디밭에서 분수쇼를 구경시키던 곳. 둘이 같이 다니던 각종 전시회와 음악회가 열렸던 곳. 차 마시고 밥 먹었던 식당과 카페. 집에서부터 한 시간 남짓 걸어오던 산책로가 있는 뒷산 우면산. 세 부부 이웃들과 연례행사로 새해 첫날 새벽등산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했던 예술의 전당 바로 앞 유명 맛집 한식당. 환하게 불 밝혀져 있던 야외천막 식당 앞에서 줄 서서 사 먹었던 여름밤의 쫀득쫀득 터어키 아이스크림. 목동 댄스팀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함께 참석하게 된 송년의 밤 음악회. 음악회가 끝난 후 바깥 뜰에서 깜짝쇼로 진행된 송구영신 불꽃놀이. 추위도 잊은 채 웃으며 환호성 지르던 우리 열 명의 50대 장년 부부들.
선뜻 내키지 않아 했지만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밀어붙이는 나를 따라와 주느라 매번 함께해 주었던 남편. 임종 직전에야 덕분에 많이 누렸다고 고백했지만 혼자가 된 이제 미처 읽어 내지 못했던, 불편해했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애썼어요,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