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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25. 2023

남도 기행

 21년 전에도ᆢ

 여고 정기 총동창회 10월 공연을 기분 좋게 끝내고 봄부터 기획 준비해 온 칠순기념여행을 떠났다.

ㅡ전라도 별미 남도일주

 2박 3일 (11월 14일 화 ~ 11월 16일 목)             

 참석 인원 29명

 경유지

 신안 천사섬, 퍼플섬, 강진 가우도 청자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목포 유달산, 하동 케이블카, 금오산 하늘길, 담양 소쇄원 ᆢ .

 별미

 무안 낙지 비빔밥, 목포 회 정식, 강진 한정식, 해남 보리밥 정식, 담양 떡갈비 정식 ᆢ.

 숙소

 신안 비치호텔, 광양 락희호텔.


 서로 믿고 의지하며 같이 늙어가는 오래된 친구들과 뜻 깊은 칠순기념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지고 아름답게 가꾸어진 다도해의 여러 섬들을 웃고 얘기 나누며 걸었던 도의 이 길이 또 어느 때인가는 추억 속의 한 자락으로 기억될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여행하는 내내 마음 깊은 한 곳에서는 남편과 함께 다녔던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친정은 부산이고 시댁은 경남 함안이다 보니 전라도 쪽으로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기업 스카우트 취업으로 남편은 결혼 이듬해인 78년 여름, 부산에서 서울로 떠나고 나는 다니고 있던 직장을 정리하느라 이듬해인 79년 3월, 돌잔치를 끝낸 첫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이후 이어진 50년 가까운 서울 생활. K장남답게 시댁은 1년에 네댓 번, 친정은 한두 번 먼 길을 오고 갔다. 1986년 하얀 프레스토 소형 승용차가 부장급인 남편에게 지급되기 전까지는 기차를 이용했다. 제일 빠른 새마을호로 4시간 반을 달려가는 곳. 거기서 다시 10분 거리 택시를 타거나 1시간을 걸어야 하는 곳.

 회사에서 명절 선물로 3kg짜리 백설표 설탕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귀한 것이라 부모님께 드린다고 가방에 챙겨 넣었다. 기념 타월이 생기면 한 장 한 장 아껴 모아 갖다 드리고 새로 막 나오기 시작한 트렁크 팬티와 하얀 백양 메리야스 러닝, 아버님 어머님 속옷을 때마다 사서 무거운 가방 속에 꼭꼭 눌러 담아 가곤 했다. 그 가방을 들고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부모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에 최대의 가치를 둔 시절이었다.


 5년, 10년 시간이 흘러 다섯 식구가  되고 승용차로 다니면서부터 운전을 맡은 남편은 엄청 긴장했고 출발 전 반드시 정비소엘 들러 타이어 압력과 냉각오일, 브레이크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곤 했다. 차계부도 철저히 기록했다. 가족의 안전이 달렸으니 책임감이 오죽했을까? 휴게실에도 들르는 둥 마는 둥 오로지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달렸다. 다 같이 움직이는 명절이나 휴가철에 우리도 길을 나섰으니 도로가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교통망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유일한 도로인 경부고속도로. 양 옆으로 솟아 있는 높은 산들과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오종종한 마을들이 차창 너머 풍경의 대부분이었다. 열 살 차이 나는 세 아이들을 좁은 차의 뒷좌석에 태우고 26시간 만에 도착한 어느 해 추석도 있었다. 먹거리와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까마득한 시간 속에 이미 다 잊혀 버렸다. 열심히 굶고 열심히 참았을 것이다.

 시댁에 도착해서 다시 서울로 출발할 때까지 내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은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는 재래식 부엌이었다. 젊었고 꾀를 부릴 줄 몰랐으며 우직하게 그 힘든 시간들을 열심히 걸어왔던 것 같다.


 전라도 쪽으로 처음 가 본 때는 2002년, 결혼 후 25년 만이다. 남편이 이른 명퇴를 통보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해이다. 늘 최연소 승진을 지키며 승승장구해 왔고 51세에 대기업 전무로 승진한 지 1년 만의 일이다.

 2002년은 참으로 우울한 해였다. 5월에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1월에는 시아버님이 먼길 떠나신 해다.


 남편은 상상치도 못했던, 그의 사전에는 당연히 없으리라고 믿었던 해고의 충격에 거대한 쓰나미를 만난 듯 휘청거렸다. 갑자기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한 우울감에 깊이 빠진 듯하다. 한강 다리 위에도 두 번이나 갔다고 말했다.

 곧 다른 직장으로 연결되었지만 평생 그 트라우마는 길고 깊게 자리 잡았다.

 나는 겉으로는 대범한 척했지만 그 당시의 충격은 나에게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른 봄날 아파트 창밖의 환한 햇살 아래 지구가 우리 가족만을 내려놓고 계속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었다.


 수십 년 간 빼먹지 않고 이어졌던 아침 출근이 멈추어진 어느 봄날 하루, 남편과 나는 아버님 병문안 차 시골로 가는 길에 해남 땅끝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때가 전라도 쪽으로 가 본 첫걸음이다.

 산들만 보이는 경부고속도로와 달리 끝간 데 없이 가닿는 시선 저 멀리 아련한 지평선이 보이고 싱싱한 초록빛 마늘밭이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모퉁이를 돌지 않고 전방의 지평선을 향해 계속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긴 고속도로를 달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중간중간 길 양쪽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는 신기한 길을 달렸다.

 해남 땅끝 마을을 안고 있는 초봄의 바닷가 공기는 투명하고 신선했다. 채 오염되지 않은 모든 자연이 상큼했다. 몇몇 명소를 둘러보고 지나가던 길가의 농원에서는 곱게 반짝이는 튼튼한 초록 잎에 고혹적인 빨간 꽃을 매달고 있는 동백 화분을 샀다. 그 나무는 우리가 함안을 떠나온 3년 전까지도 시골집 화단에 튼튼히 뿌리내려 자라고 있었다.


 20년 전 남편과 함께 달렸던 그 길, 초봄 땅끝마을의 상큼했던 정경, 도의 인상 깊었던 분위기가 어제런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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