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여섯 손주들이 모두 새 출발을 한다. 고3, 고1, 초등 6, 초등 5, 첫 어린이집 등원, 그리고 여섯 번째 막내 손주의 백일.
3월 1일, 백일날, 세 아이들의 네 가족 열두 명과 나를 포함한 열세 명이 모두 아들네 집으로 모였다. 반년 전, 남편이 떠나간 후 처음 맞는 가족행사다. 백일을 맞는 손자가 먼저 떠나가신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웠다. 사돈어른 부부와 무남독녀인 며느리의 이모님 부부 두 분까지 동참하여 집 안이 남녀노소로 그득했다.
며칠 전부터 현관 입구에 버티고 있던 커다란 택배 박스 안에서 별별용품들이 다 나온다. 테이블보, 백일 휘장, 백일 의상, 플라스틱 모형 과일, 조화, 아가 의자ᆢ. 진짜 백설기 백일떡과 수수떡은 오늘 아침 배달된 모양이다.
거실 창문 쪽에 제법 구색을 갖춘 백일상이 금세 마련된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화와 모형 과일은 센스 있게 생화와 생과일로 교체되었다.
박스 안에서 나온 간단한 개량 한복을 입히고 두건까지 씌우니 여릿하던 갓난쟁이 손자가 한순간 의젓한 도령으로 변신한다. 이미 화려한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던 2년 터울 누나와 둘이 이 잔치의 주인공이 되었다.
점잖게 앉아 있는 손자의 의젓한 모습에 어른들의 격려가 쏟아지고 재롱떠는 손녀의 작은 애교에도 커다란 웃음소리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다. 너도 나도 핸드폰으로 그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부산하다. 점잖게 앉아 계시던 남자 어른들도 어느새 상 앞으로 다가가 진지한 몸짓으로 공간을 확보하고 아가들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며느리의 이모님이 준비해 오셨다는 잡채와 샐러드를 전채요리 삼아 시간 맞춰 배달되어 온 중화요리로 잔치상이 벌어졌다.
밤에 카톡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진들을 보니 또 한 번 싱긋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중의 한 장이 눈에 쏙 들어온다. 백일상 위에 점잖게 앉아 있는 두 손주들 사이에 안경 낀 아들의 얼굴이 빼꼼 드러나 있다. 어린 두 아가들이 행여 뒤로 넘어질세라 떨어질세라 식탁 아래 쪼그리고 앉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들이 자리를 조금 옮기느라 잠깐 허리를 편 모습이다. 젊은 아빠의 귀여운 모습이다. 얼굴 한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조금 전까지 평상복 모드로 가겠다며 편한 라운드티 차림이더니 어느새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 차림이다. 아내인 며느리의 조언 덕분인 듯하다.
출산 3개월 만에 이미 출근을 시작한 며느리와 아들이 오손도손 의논 맞춰 치러내는 화기애애한 이 행사가 아름답고 귀하다. 안사돈 어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며느리와 안사돈이 긴밀하게 서로 의논하고 도움 받는 모녀지간 모습이 정겹다.
열흘 전 도보 20분 거리, 가까이로 이사 온 아들네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아빠, 제가 가까이로 이사 오니 힘내세요."
투병 중인 아빠의 귀에 대고 들려주던 격려의 말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도우미 아주머니 일손은 한 분인데 아가는 둘이니 나보다는 조금 더 멀리 계시는 안사돈과 내가 교대로 보조 도우미가 되었다. 나의 당번 시간은 젊고 딸 하나를 두신 안사돈의 10분의 1이다.그런데도 살짝살짝 뻣뻣해지는 허리가 과부하 위험 신호를 보내온다.
12시까지 모이기로 한 오늘 아침은 새벽부터 꽤나 바빴다.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이는 손주 여섯 명에게 줄 카드를 준비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구입해 둔 특색 있는 카드들을 꺼나 본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떠올리며 편지를 쓰고 학령에 맞는 적당한 액수의 용돈을 꽃이 그려진 예쁜 종이에 곱게 싸서 동봉한다. 예상외로 긴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하나하나 봉투가 완성되어 여섯 개의 두툼한 카드 뭉치를 손에 쥐니 뿌듯해진 마음속으로 잔잔한 기쁨과 따뜻한 감사가 피어올랐다.
오늘 말씀 달력의 글귀도 우연이 아니라 그분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며 축복이다.
ㅡ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마르코 복음 10장 16절.
He embraced them and blessed them, placing his hands on them.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