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엘 들렀다. 오랜만이다. 10년 가까이 다닌 동네 단골 치과다. 나보다 10년 정도 젊으신, S대 출신 R 선생님. 워낙 바쁘고 뛰어나신 분이라 먼 거리에서 흠모하며 자주 기억하는 분이다. 나로서는 꿈도 못 꿀 만큼 깊고 넓고 부지런한 신앙생활을 하신다. 특히 선교에 진심이시다.
오늘도 치과 의자에 누워 잠깐 진료를 받는 사이 귀한 정보를 주셨다.
그레초 성당 성탄 800주년 기념 전대사 수여 뉴스다. 1223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탈리아 그레초에서 최초로 성탄 구유를 만드셨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 시계의 알람 소리에 깨어나 준비를 마치고 6시 10분 치과 앞으로 갔다. 선생님도 바로 나오셨다.
깜깜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 속, 반포대교를 지나 아직은 차량이 뜸한 넓은 길을 휑하니 달려 10분 남짓 지나니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 새벽 미사 시작 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이달의 교황님 지향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수도원 마당에 차려진 성탄 구유 앞에서 정해진 기도를 바쳤다.
성당 입구, 묵직한 나무문을 밀자 성당 내부의 환한 빛이 쏟아졌다. 수도원 수사님들이 스무 남은 명 앞자리에 앉아 계셨고 일반 신자들도 꽤 많이 뒷좌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벽미사는 왠지 좀 더 거룩하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미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한적했다. 한남대교를 건너 금세 치과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선생님이 내가 우리 집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 주셨다. 초등학교 자녀들을 돌보고 하루 진료를 준비하려면 바쁘신 시간일 텐데 추운 길을 팔짱을 끼고 같이 걸어 주셨다. 나 같으면 차에서 내려 잘 가시라는 말 한마디 툭 던진 후 돌아보지도 않고 따뜻하고 환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선생님과 주고받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따뜻하고 재밌다. 다시 치과까지 선생님을 보내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8시 22분, 선생님이 카톡을 보내오셨다.
"선생님, 내일도 가실 수 있으셔요?"
바로 답장을 드렸다.
"6시 10분까지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네 명이 그 차에 동승했다. 일을 다니기 때문에 토요일밖에 시간이 안 된다는 두 분을 위해 일일이 그분들 집 가까이로 가서 그분들을 태우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나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 새벽, 어둠 속의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움직임들이었다.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바로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분의 뒷모습들이 낯익었다. 바로 우리 본당 교우 자매님들이었다.
'저분들도 이 미사에 참여하시는구나.'
미사가 끝나고 성당 마당 구유 앞에서 함께 기도를 바치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승용차 없이 왔다는 말에 몇 시에 출발하셨냐고 물었다.
"5시 5분에 모여 같이 출발해요."
"5시 5분요?"
깜짝 놀라 반문했다.
"6시 30분 미사에 참여하려면 우리 동네에서 첫차를 타도 늦기 때문에 20여 분 걸어서 동작역에서 전철을 두 번 바꿔 타고 또 걷고 해서 여기로 와요."
"우와~!"
갈 때는 선생님 차로 같이 가자고 권했더니 걷는 시간까지 봉헌한다며 거듭 거절하고 추운 밤공기 속으로 총총히 멀어져 갔다. 생글생글 해맑은 웃음들을 남기고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나로서는 상상도,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별천지의 신앙생활이었다.
도보 순례자는 그날 이후 또 한 명이 늘어났다. 성서백주간을 함께 하고 있는 T자매, 꽤 오래된 세월 변함없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자매님. 네 분이 함께 걸어 다닌다고 했다.
그중에 한 분은 심리 상담을 전공하신 분이다. T자매의 소개로 평소에 친분이 있었고 남편의 일을 겪으며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도 내가 준 책을 고맙게 잘 읽었다고 한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죄송한데 책 제목이 뭐였나요?"
"<성당지기 이야기> 요."
"아아, 그 책이었구나. 정말 좋은 책이지요."
순간 잊고 있었던 그 책 생각이 났다. 네 권을 더 구입했다. 중간에 우리와 동참하여 나흘 동안 운전을 맡아 준 M자매님과 선생님께 그 책을 한 권씩 드렸다. 나도 그 책을 다시 읽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랑의 가시밭길을 오로지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담고자 한없이 순수하고 맑게 걸어가는 한 사제의 겸손하고 따뜻한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름은 밝히지 않으신다. 성당지기라고만 하신다.
얼마 후, 길에서 만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책을 읽는 동안 그냥 줄줄 눈물이 흘렀어요. 눈을 보고 사람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어요."
선생님과 나는 또 길 한복판에서 한바탕 밀도 높은 수다를 떨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던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고 짧은 대화를 접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 책에서 발췌해 놓은 조금 긴 글을 카톡으로 보내 드렸다.
다음 진료 시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참 깊고 좋은 이야기에요."
"이 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ㅡ예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누군가를 위한 끝없는 대속임을 깨닫게 될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못나서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많아서 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