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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독후감 가즈오 이시구로

by 서무아

책의 목차는 '제 1장, 1930년 7월 24일, 런던'으로 시작하여 '제 7장, 1958년 11월 14일, 런던'으로 끝난다. 주인공이 사설탐정으로 탄탄한 뿌리를 내린 시점부터 실종된 줄 알았던 부모님 두 분 중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찾아낸 시점까지의 28년 세월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실제 시간 배경은 1910년 경부터 1958년까지이며 주요 공간 배경은 중국 상하이와 영국 런던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로 화자의 기억에 의지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주인공은 화자로 등장하는 크리스토프 뱅크스ㅡ애칭은 퍼핀ㅡ이지만 나는 그의 어머니 다이애나 로버츠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네 명의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 여자, 다이애나는 상하이 주재 영국 기업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회사가 제공하는 상하이 공동 조계, 외국인 공동 거주지 사택에서 산다. 회사 소유의 집인지라 처음 부임해 온 사원들에게 그들이 자리잡을 때까지 숙소로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젊은 사원 필립이 이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이후 그녀의 아들 퍼핀이 태어났다. 퍼핀은 그를 필립 삼촌이라 부르며 몹시 따랐다. 필립은 일찌감치 그 회사를 그만두고 상하이 중국인 구역의 환경을 개선시키는 데 전념하는 '성수'라는 자선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벌이는 아편 반대 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여 매주 토요일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고정적으로 참석했다. 상하이의 점잖은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이끄는 아편 반대 운동에 탄복했으며 훌륭한 부인이라고 확신하며 상하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국 여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가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입해서 한 나라 전체를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과 타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양심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남편에게 모종의 결단을 요구한다. 남편은 자기는 그럴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며 회사를 떠나서는 본국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마련할 수 없는 처지임을 하소연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퍼핀과 어머니는 그가 아편 무역을 하는 고용주에게 맞서다가 납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그를 찾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그 남편은 정부와 함께 홍콩으로 도주하여 2년 만에 말라야에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먼 훗날 필립을 통해 알게 된다. 그는 자기 아내를 숭배하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되기를 절박하게 원했지만 자신이 그런 존재가 못된다는 것을 깨닫자 자기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는 다른 여자와 떠나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2, 3주 후의 어느날, 중국으로 들어오는 아편 무역을 막으려는 캠페인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어머니에게 그 운동을 돕겠다고 군벌 왕 쿠가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필립 삼촌과 함께 맞이했다. 그러나 사실은 양쯔강을 통과하는 유럽 여러 나라의 아편 선적을 탈취해서 왕 쿠 자신이 그 아편을 팔아먹을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자기 동포의 배신자이며 사악한 앞잡이이고 그런 인간의 도움은 원치 않는다고, 다시 우리 집에 나타날 경우 더러운 짐승에게 하듯 침을 뱉어 주겠다면서 그는 바로 그런 더러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쏘아붙였다. 산적이나 다름없는 군벌들 가운데에서 세력이 큰 축이라 아주 잔인한 작자였으며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는 침착하게 그 모든 비난을 듣고 있었다. 떠날 때는 두 명의 부관을 대동하고 번쩍이는 자동차에 올라 그녀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며칠 후 퍼핀은 한커우 거리에서 본 프랑스제 피아노 아코디온을 사 주겠다는 필립 삼촌을 따라 어머니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복잡한 중국 거리에 들어선 어느 한 순간, 필립 삼촌은


"난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구나, 알겠니?"


라는 말을 남기고 퍼핀을 버려둔 채 자취를 감춘다. 복잡하고 먼 길을 정신 바짝 차리고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집을 향해 달려왔지만 너무 늦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열 살 짜리 소년, 퍼핀은 영국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192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에서 작은 아파트를 얻어 탐정으로서의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몇 가지 어려운 사건을 탁월하게 잘 해결해 가면서 점차 명탐정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1937년, 퍼핀은 아직 아무 실상도 모른 채 부모님이 납치된 사건이 미결로 남아 있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 보기 위해 상하이로 향한다. 세계를 내 손에 넣어 보겠다는 일본의 야망이 중국으로 손을 뻗었고 중국 지도부는 그 앞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과 권력을 챙기기에 급급해하던 시절이다. 토끼굴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열악한 중국인 노동자 거주지역의 비참한 생활상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 동안 모아온 여러 자료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부모님 납치 사건의 열쇠는 중국 정부가 보호하고 있는 공산당 밀고자 '노란 뱀'이 쥐고 있었다. 퍼핀은 그를 만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노란 뱀', 그는 다름아닌 필립 삼촌, 바로 그였다. 스스로 배신자라고,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일은 아니었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며 이어지는 그의 서술로 이 소설은 엄청난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린다. 그리고 곧이어 대단원의 결말로 이어진다.


두 분 부모님이 상하이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고 굳게 믿어 왔던 퍼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부모님이 갇혀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주택을 찾아냈지만 허사였다. 필립은 그에게 왕 쿠의 방문과 어머니의 실종으로 이어진 그 사건의 전말을 이렇게 알려 준다.


ㅡ그런데 진실은 말이다, 그보다 훨씬 진부하단다. 왕 쿠와 너희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게 끝난 날, 나는 그때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걸 알았지. 어김없이 닥쳐올 재앙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왕 쿠는 그녀의 기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자기의 요새인 후난으로 데려가 첩으로 삼고 싶으며 야생 암말을 길들이듯 그녀도 '길들이겠다'라고 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왕 쿠같은 사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너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그자와 협상을 벌여 너를 그 자리에서 피하게 만들었다. 왕 쿠의 요새인 후난성으로 납치당해 간 그녀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왕 쿠의 초대로 그곳에 들른 나를 만나 처음으로 아들 퍼핀이 영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몹시 기뻐하며 7년 간의 고통스러운 의혹에 시달렸던 마음의 평온을 찾으며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진행된 아편 근절 운동의 추이에 대해서도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아들만 없었다면, 아들에 대한 사랑만 아니었다면 그 악당이 자기 몸에 손가락 하나 대기 전에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고려하여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하고 협상을 했다. 그녀 자신이 순종하는 대가로 아들이 재정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있도록ᆢ.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침대에서 그에게 굴복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고 그자는 '백인 여자 길들이기'라고 부르며 만찬 손님들 앞에서 자주 그녀에게 채찍질을 하곤 했다.


뒤이어 필립은 "그뿐만 아니라ᆢ" 라는 말로 그녀가 겪은 더 큰 굴욕과 고통을 암시한다. '네 학비, 런던에 있는 너의 집, 네가 성취한 것 모두가 왕 쿠에게, 아니 네 어머니의 희생에 빚진 것'이라는 필립의 지적에 자신이 누린 경제력이 이모가 남긴 유산인 줄로만 알아왔던 퍼핀은 이렇게 절규한다.


"어째서 이렇게 나를 고문하느냐?"라고.


필립은 대답한다.


"어째서냐고? 그건 네가 진실을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그리고 한참의 고뇌 어린 침묵 끝에 다시 그의 처절한 고백이 이어진다. 왕 쿠에게 그녀를 납치하도록 방조했던 것은 자신을 점잖은 사람으로 존중하는 그녀 앞에서 그녀를 만난 첫날부터 줄곧 느껴온 소유의 욕망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걸 아버지의 실종 후 확실하게 알게 되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고. 2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왕 쿠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4년 전 왕 쿠가 죽자 장제스는 그의 군벌을 해체시켰으며 1937년 현재 어머니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그로부터 또다시 20여 년이 흐른 1958년, 어머니와 헤어진 지 거의 50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퍼핀은 홍콩의 로즈데일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전쟁이 끝난 1945년, 한 번 들어가면 그 어느 누구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다는 충칭의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2년 전인 1956년, 몹시 동요된 상태로 이곳에 보내져 왔다는 가련한 여인, 다이애나 로버츠. 우아하고 등이 곧은 것은 물론 도도해 보일 정도로 기품이 있으며 눈에 온화한 빛이 어려 있었던 아름다운 여인. 기독교인으로서, 영국인으로서의 도덕관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타협을 모르고 정의롭게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기개 높았던 여인. 그 모든 굴욕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아들이 좋은 삶을 누리는 것, 그 하나만을 원했던 어머니. 그러나 지금은 모든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고통의 순간이 다 지나간 듯 만족한 표정으로 혼자만의 카드놀이에 열중하는 할머니.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된 아들, 어느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아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오열하는 아들 퍼핀을 눈앞에 두고도 그의 어깨너머 먼 허공으로만 시선을 모으는 어머니. 그러나 '퍼핀'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순간 환하게 행복한 얼굴이 되며 용서라는 말에는 용서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용서해야 하는지 되물으며 어리둥절해하는 어머니. 퍼핀은 어머니의 그 해맑은 표정을 보며 지금은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영국의 집으로 모셔도 그보다 더 잘 지내시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50년 만의 운명적인 만남을 끝낸다.


한 가정의 반듯한 아내로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어머니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정의로운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았던 다이애나, 그녀의 가혹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일생. 혼인의 약속으로 엮였지만 자신의 무능력감으로 배필을 버리고 간음의 길을 걷는 남편. 이 땅의 힘인 온갖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도구로 자신의 욕망을 더 확장하기 위해 끝도 없는 잔혹한 죄를 짓는 왕 쿠. 겉으로는 지성과 양심과 예의를 갖춘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더 큰 본능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필립. 어머니의 끔찍한 희생으로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아들 퍼핀. 이 모든 인연의 한 복판에 그녀가 있었다. 더러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대놓고 면전에서 비난한 상대에게 납치되어 짐승보다 못한 정신적 육체적 굴욕을 겪는 참담한 세월을 보내야 했을 때 그녀는 무엇에 의지했을까? 남편이 실종된 후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에게 그녀가 말했듯이 하느님께 기도를 계속하고 언제나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의 참담한 희생을 보며 이 글의 주제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순종'이라고 생각해 본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이해력, 이야기 전개의 치밀한 구성,


사건과 심리를 세심히 그려내는 문장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1954년 생으로 현재 생존해 있는 그에게 2017년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독후감에서는 책 내용을 절반도 다루지 못했다. 주인공 화자인 퍼핀을 둘러싼 굵직한 주요 등장인물 몇 명에 대해서도 미처 언급하지 못했다. 스무세 살 때 처음 알게 된 후 60세의 독신 노인으로 살아온 지금까지 서로 고아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영원한 마음속의 연인으로 간직해 온 미스 세라 헤밍스와의 엇갈린 인연들,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바로 옆집에 살며 날마다 함께 놀았던 단짝 친구 아키라와의 우정과 교전 상태인 토끼굴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27년 만에 극적으로 해후하여 1박 2일을 함께하다 헤어진 사연, 1937년 양친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고아가 되어 버린 제니퍼를 양녀로 맞이하여 그 외로운 성장을 지켜보며 보호자로서 더 많이 함께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때늦은 후회, 그리고 부수적으로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세실 경, 친구 오스본, 체임벌린 대령, 쿵 경감, 일본군 대위, 운전기사 중국 청년 등등.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중 어느 한 명에게도 소홀함이 없이 그들의 특성과 역사를 생생히 그려낸다.


영국적 예절과 세심함이 깃든, 슬쩍 초연한 어조로 평가되는 작가 특유의 문체가 그 한 명 한 명에게 살아있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를 갖춘 영국 최고 절경의 위대함을 사랑한다는 작가의 표현 ㅡ남아 있는 나날ㅡ이 자신의 문체를 설명하는 데 딱 맞는 서술 같다.


방대하고 치밀하게 펼쳐지는 이 작품 전체를 언급하는 일이 나에게는 역부족이라 어느 한 부분씩 나누어 초점을 맞춘다면 적어도 다섯 편 이상의 독후감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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