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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ul 19. 2024

나 없어도 되지?

  순종과 수용

 숲 속 야외, 넓은 마당에서 어떤 강의를 들을 참이었다. 내 옆에는 친구 M과 Y가 갖가지 새로운 기기들을 조작하며 강의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고 기기 사용에도 서툴러서 걱정이 되었다. 땅에서 주운 어떤 전선 코드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물이 있는 웅덩이를 발견했지만 흙탕물이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조금 맑은 물이 고여 있어 거기서 코드를 씻었지만 어설프고 엉성했다.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선을 감싸고 있는 껍질 속에 쌓여 있는 흙을 씻어 내면서 칫솔 같은 도구가 있으면 더 깨끗하게 잘 씻어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넓은 공터 한가운데 있는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치우러 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뚜껑을 여니 하얀 연탄재가 쓰레기통 속에 가득 들어 있었다. 어떻게 처리하나 망설여졌다.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다른 통을 알려 주었다. 다행이다.


  저 끝에서 쌍꺼풀진 두 눈에 따뜻하고 밝은 웃음을 가득 담은 남편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아가면서 점점 보기 힘들어진 달콤한 표정이다. 둘이 눈길이 마주쳤다. 항상 그랬지만 방금 공중탕을 다녀오기라도 한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이었다. 자주 입는 겨울용 자주색 두터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건강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내 앞에서 멈추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며 멈칫멈칫 작은 소리로 내가 물었다.

 "안아 봐도 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응, 안아도 돼."

 남편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두 팔 벌려 안아 주는 남편의 따뜻한 품에 포옥 안겼다.


 내 머리 위에서 남편이 말했다.

 "여보, 여보, 나 없어도 되지?"

 둥글고 온화한, 건강한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묻은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없어도 돼."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났다.


  ㅡ여보, 자기 없이도 나 잘 지내. 모두 자기 덕분이야. 아무 걱정 하지 마. 그동안 고마웠어. 나 잘 지내, 잘 지내. 아이들도 다 잘 지내고 있어.

 자기도 잘 지내, 안녕. 고마웠어, 안녕. 힘들어했던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잘 지내. 아무 걱정 하지 마. 자기는 어디서든 잘 지낼 거야. 나도 그래, 나도 잘 지낼 수 있어, 잘 지내고 있어.


 꿈속에서도 나는 남편을 훨훨 날게 해 주고 싶었다. 지니고 있는 귀한 능력들 한껏 발휘하면서 밝고 기쁘게 지냈으면 했다. 지상에 남겨 둔 어느 누구에게도, 세상 떠난 어느 누구에게도 발목 잡히지 말라고, 당신은 충분히, 최선을 다하여 당신의 의무에 이미 충실했다고, 숙제는 다 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눈썹 곤두세우고 딱딱한 표정으로 변함없이 늘 내세웠던 굳건한 가치관. 국가에 충성, 부모에 효도, 사회에 공헌. 살아생전 공감하고 존중해 주기보다 문제 삼기 일쑤였지만 그게 결코 문제 되는 가치관은 아니라는 것,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도 말해 주고 싶었다. 더 이상 우울해하지도 힘들어하지도 않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바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죽음 앞에서 이해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용되지 않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


 6년 전 오늘, 2018년 7월 17일은 함안살이를 위해 서울을 떠났던 날이다. 이삿짐 트럭을 앞세우고 한여름 폭염 속에서 일흔을 코앞에 둔 남편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천리길을 둘이 달려갔던 날이다.

 1978년 6월, 20대 후반의 풋풋한 나이에 직장 하나 따라 낯선 서울로 올라와 가정을 일구며 키워 온 지 어언 40년이 흐른 시간이다.


 2018년 2월, 남편이 완전히 직장생활을 접었고 4월, 3년 간 한 집에서 살았던 둘째네 네 가족이 훌쩍 자라 유치원엘 다니기 시작한 손주 두 녀석을 데리고 독립해 떠나갔고 3월에는 서른한 살 아들이 새 신랑이 되어 결혼식을 올리고 새 가정을 꾸려 떠나갔다.


 일곱 명이 살던 50평 공간에 덩그러니 둘만 남은 우리가 새 출발지로 선택한 남편의 고향, 함안.

 돌아보면 묻혀 있는 과거의 정서적, 물리적 뒷정리를 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 그곳. 부모님들의 80년, 70년 긴 세월이 녹아 있는 곳.

 여리고 예민한 남편, 평생 장남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져야 했던 남편에게는 그곳의 자연과 사람이 마냥 편안한 곳만은 아니었다.

 2년 만에 그 집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계속되는 코로나로 자의 반, 타의 반 고립을 선택한 시간. 투병으로까지 이어진 힘들었던 시간들.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한계였다.


 어떤 회한도 자기 검열도 건강하게 극복하고 주어진 지금을 수용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꿈을 통해 남편이 알려주나 보다. 죽음은 일종의 聖化다. 나보다 먼저 깨달았으니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을 테지.

 잘 지내겠습니다, 당신 없이도ᆢ.

 당신도 잘 지내요, 나 없이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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