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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시간

이 모습 이대로, 영원히

by 서무아

2024년 12월 5일 목요일.

28회 졸업생인 86세 선배부터 47회 후배까지 42명, 그리고 10년 공백을 훌쩍 건너뛴 57회 후배 2명, 이렇게 44명이 점심 식사 겸 한 자리에 모였다.

재경 여고 동창회 운영위원회 및 송년 모임.

올해 초 총회장에 선출된 39회 J 선배님은 두 달에 한 번씩 만나 뵐 때마다 점점 더 젊어지고 점점 더 회의 진행이 능숙해지신다. 오늘 정말 예쁘시다고 인사드렸더니 본래 한 인물 한다고 응수하셨다.


각 기수별로 2024년 1년 동안의 활동을 간단히 소개했다. 내년 10월에 열릴 재경 총동창회 정기총회에서 선 보일 팔순기념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36회 회장님은 리더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셨다.

ㅡ나이가 팔순이나 되다 보니 무대에 설 친구가 없다. 본인이 아프거나 배우자가 아픈 경우가 많다. 첫 모임에 겨우 열 명이 모였는데 열두세 명만 모여도 뭔가 해 보겠다.ㅡ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열 달 후인 내년 10월이면 분명히 뭔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선배들이 해 오신 것처럼. 그것을 알고 있는 우리 모두는 힘차게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환갑과 칠순을 맞은 기의 기념 공연이 몇 해 전부터인가 슬며시 칠순과 팔순 기념 공연으로 바뀌었다. 후배는 끊기고 평균수명은 길어진 것이다.


각 기마다 2년 임기의 회장단을 뽑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총대 메는 일이 벅차기 때문이다. 그중에 참신한 아이디어 하나가 우리를 웃게 했다. 고3 때의 반별로 임원진을 뽑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3학년 1반 친구들, 다음에는 2반 친구들ᆢ. 그것 참 재밌는 생각이다.


꼭 참석해 달라는 간곡한 연락을 여러 차례 받고 이 자리에 나오셨다는 대선배님, 31회 여든세 살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ㅡ오늘, 석 달 만에 분 바르고 나왔어요. 작대기 짚고 나왔어요. 그동안 동창회 일, 절 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몸도 너무 무리하니까 화를 내더라고요. 저처럼 미련 떨지 말고 조금 아플 때 미리미리 치료하세요. 건강 관리는 미루어서 큰일 만들지 마세요. 어쨌든 건강 챙기는 게 최고입니다. 꼭 명심하세요.ㅡ


이어서 근황들이 소개되었다. 일흔여섯 살이신 38회 선배가 올해 마지막으로 태평무 발표회를 가졌다는 소식. 2주에 한 번씩 열여섯 명이 만나 동네 한 바퀴 도는 팀과 매주 열여섯 명이 모여 라인댄스를 배우는 팀이 있다는 41회 모임. 이번 재경 총동장회장직을 맡으신 선배님이 계시는 39회는 90명이 참석하는 단톡방을 가지고 있으며 이번에 84명 친구들이 1인당 500만 원부터 10만 원까지 모두 뜻을 함께하여 총동창회에 기부금 3,060만 원을 전달했다는 이야기 등등ᆢ.


마지막 가장 환영받았던 소식은 57회 후배 두 명의 참석이었다.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진 48회부터 실질적인 동창 개념이 단절되었다. 선배들이 무척 노력했지만 워낙 변화가 심한 탓에 동질감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동창회에서는 계속 모교 발전 기금 모금에 정성을 쏟고 서울로 진학하는 신입생들을 챙겨 입학 축하금도 전달하고 식사 자리도 마련하는 등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왔지만 별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57회, 50대의 두 후배가 10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원로 선배님들의 환대가 열렬했다.

ㅡ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서 모교 동창회가 이렇게 시부지기 끝나 버리나 걱정했는데 희망이 보인다. 2027년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47회 이후 단절된 후배들을 주위에서 열심히 찾아서 동창회를 이어가도록 후배 발굴 프로젝트를 강화하자.ㅡ


물심양면으로 총동창회의 큰 기둥 역할을 맡아 오셨던 31회 P선배님은 이번 회장단에게 찬사를 던졌다.

"이렇게 잘할 줄 몰랐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57회 후배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자리로 오셨다.

"제가 오늘 너무 흥분이 됩니다. 모교 교장 선생님을 지내셨던 유치환 선생님의 시 한 편을 암송해 보겠습니다."

"제목은 아지랑이입니다."

잠깐 마이크를 들고 호흡을 고르시더니 아름다운 창을 뽑아내신다.

"어화능 어화능 어화능차 어화능~"

"이건 상두꾼이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창입니다."

짧은 설명을 마치고 즉흥적으로 감성 가득 실린 긴 시를 암송하셨다. 아름답고 힘 있는 목소리, 리듬을 타면서도 정확한 발음.

실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그 공간 속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서정시 한 편.

시 한 편도 제대로 다 못 외우는 나는 그 선배님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여든세 살,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선배님의 오늘 이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몇몇 눈에 띄는 분들의 눈도 바알갛게 젖어 있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함께해 주십시오.



아지랑이

청마 유치환


어화능 어화능 어화능차 어화능


천지는 온통 아슴아슴 피어나는 봄인데

종다리는 어디메서 저렇게 울어만 쌓는데

아지랑이 보오얀 장막, 풋 보리 푸른 이랑을

빨간 만장, 노란 만장 나부끼고 가는

죽음 하나


천지는 온통 피어나는 목숨에 젖었는데

한 지엄한 가르심은 가르심대로 있어

이제 육신은 들녘으로

목 메이는 정은 가슴팍에ㅡ

절통한 非情도 이렇듯 스스로이 이루어지매

한 가지에 피는 꽃, 지는 꽃이 있듯이

그래 삶은 있는가?

흐느낌도 고운 것인가?


짐짓 목숨이란 아지랑이

설우면 설운대로 아지랑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아지랑이, 아지랑이

그대 가고 내 남을 그날이여

내가 가고 그대 남을 그날이여

모처럼 上氣한 하루 공짜표도

그저 아깝고 겨웁기만 하여

화안한 치레들이 안으로 곪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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