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외사촌 형님들 두 부부를 모시고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70을 전후한 6명이 모였다. 함안과 가까운 거리인 경남 진동과 마산에 사신다. 함안으로 내려온 지난 2년간 종종 만나 뵈었다. 이제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된 우리가 작별 인사를 드리는 자리다. 남편이 무학 소주에서 생산한 20년 묵은 매실주 한 병을 챙겨 왔다. 고성 읍내 장어구이집이 목적지였지만 월요일은 휴업이란다. 근처 다른 곳으로 향했다.
푸짐하게 차려 나온 복어 요리 접시들을 앞에 두고 여섯 개의 잔에 술을 채운 다음 시숙님이 명령하신다.
"내가 '이기 뭐꼬?' 하면, '보약이다.' 하이소."
순간 모두 웃음보를 터뜨린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시숙님의 건배 선창에 맞추어 다 같이 크게 소리쳤다.
"이기 뭐꼬?"
"보약이닷~~!!"
형님 부부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우리 두 까칠이도 녹아들어 갔다. 마냥 편안하고 즐겁다. 형님 두 분의 가벼운 공격들을 시숙님 두 분은 못 들은 척 흘려보내며 더 재밌는 이야기로 넘어가신다.
얼마 전까지 대여섯 개의 원룸을 운영하셨던 진동 시숙님 부부. 그전에 서울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시다가 중국 하숙집에서 강도에게 당해 크게 상해를 입으셨다. 현금을 노린 주인집 남자가 야밤에 자기 동생과 함께 방으로 들어와 도끼로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구사일생. 몇 번에 걸친 뇌수술과 오랜 고생 끝에 겨우 회복하셨다. 내조의 여왕이며 못 하는 게 없으신, 지혜롭고 씩씩하신 형님의 엄청난 헌신과 희생, 눈물과 땀이 있었다.
그때 나는 30대였는데 우연히 형님댁 사정을 알게 되었다. 자주 안부를 전하고 시간을 함께했다. 어느 날 형님이 중국에서 들여온 참깨 한 말로 기름을 짰다면서 그 7병 반 참기름을 손 하나 대지 않고 오롯이 우리 집으로 다 들고 오셨다. 형님댁은 도봉구 수유동, 우리 집은 강서구 발산동.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꽤 먼 길을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와서 기쁘게 전해 주시던 형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형님을 존경했고 형님은 나를 이뻐하셨다.
그 후 친정 남동생이 사는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싸게 구입한 산자락에 커다란 기역자 기와지붕 집을 지으시고 집 뒤 산자락을 차츰차츰 천 평 가까운 택지로 개간하셨다. 얽힌 비화가 많다. 논밭 사이로 진입로도 내셨다. 집 뒤 저수지 물을 이용하여 밭에는 시간 맞추어 살수기도 돌린다. 대로에서 바라보면 바다가 바라보이는 논밭 한가운데에 대나무 밭을 뒤로하고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기와집이 홀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이른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신 것이다.
한 번은 수월찮게 밀린 원룸의 방세를 좀 받아 오라고 형님이 채근하셨다. 멈칫멈칫 그 방 앞으로 다가가신 시숙님. 정작 세입자 앞에서 하신 말씀.
"빨리 떼먹고 도망가라."
그이는 얼씨구나 보따리 챙겨 얼른 떠났다. 우리의 터져 나오는 웃음에 시숙님은 해설을 덧붙이신다.
"나더러 자꾸 방세 받아 오라고 해서 스트레스받는데 도망가 버리고 없으면 그 말 안 할 거 아니야?"
두 눈과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너스레를 떠신다. 반전의 여유와 지혜.
뇌를 다쳐 집도 제대로 못 찾아오시던 때, 서울의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 힘든 걸음으로 운동을 계속하셨다. 형님은 시숙님의 한 발짝 뒤에서 늘 보호자 노릇을 하시고. 그런데 시숙님은 집을 놓치고 지나쳐 가면서도 입으로는 항상 노래를 부르고 계셨단다.
세월은 흘렀고 이제는 자연에 파묻혀서 착한 세 자녀의 따뜻한 효도를 받으며 마음 편히 지내신다. 부지런히 온갖 농산물들을 생산해서 나누시느라 몸을 아끼지 않으신다. 올봄에는 미국에 다녀오셨다. 큰딸은 오래전부터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고 아들도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의 보잉사에 취직하여 탄탄히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있는 작은딸은 우유를 비롯해서 부모님의 생필품들을 택배로 거의 다 공급한다. 형님이 말씀하신다.
"아아들 앞에서는 머가 마씻따는 소리를 몬한다. 당장 택배로 주문 배달해 삐리 싸서ᆢ."
형님 댁에는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른 먹거리들도 풍성하다. 드나드는 동네 사람들의 발길도 풍성하고ᆢ.
뒤이어 또 다른 시숙님 부부의 일화가 이어진다. 수십 년 긴 세월, 우유 대리점을 근면 성실하게 운영하시며 1남 1녀를 훌륭히 키워내신 분들이다. 거래하던 업체가 외상 빚을 잔뜩 진 채 빚잔치를 하던 어느 날. 400만 원 (수십 년 전의 일이니 거금이다) 빚을 받으러 시숙님이 파견되셨다. 그런데 가 보니 당신보다 딱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와 있어서 한마디 말도 못 꺼내고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셨단다.
"도저히 그 돈을 뺏뜰어(뺏어) 올 수가 없는 기라. 집에 와서는 무릎 꿇고 요강 단지 좀 들고 있으면 안 되나."
이어지는 형님의 말씀.
"너희 시숙이 안 가고 내가 갔어야 되는 긴데ᆢ."
그 후에 그 빚쟁이분이 다른 사람들 몰래 1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전해 주더라고 한다.
아침 우유 배달하는 아주머니들이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시숙님은 3시부터 그분들에게 또 배달을 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배달 아주머니들의 삶이 다 고달프다 보니 수금한 우유 대금이 대리점으로 입금되기 전에 그 가정의 생활비로 먼저 새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수금 못한 우유 대금이 수두룩하다. 그 돈만 다 받았어도 집 다섯 채는 샀을 끼다."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조금치의 아쉬움이나 섭섭함, 원망 같은 것이 없다. 마치 못 받은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두 분은 정말 열심히 긴 세월을 그 한 가지 일에 종사해 오면서 대학교 매점 판매까지 맡게 되어 편안한 노후로 이어졌다. 이제는 은퇴하셔서 고향인 여항의 양지바른 곳에 800여 평의 밭을 매입하여 예쁜 조립식 주택을 마련해 놓고 온갖 농사를 다 지으신다. 교사로, 한의사로 사회에 뿌리내린 딸, 아들에게 유기농 먹거리 제공하느라 바쁘시다. 농사철에는 마산 집보다 여기에 더 오래 머무신다. 각종 나무도 요것조것 다 심어 놓으셨다. 올해는 고추 모종을 300포기나 심으셨단다.
오랜 우유 박스 운반으로 어깨 근육이 많이 망가져서 운전대를 못 잡으시는데도 나무 가지 치기, 풀 뽑기 등으로 부지런히 하루를 움직이신다. 나보다 한 살 많으신 초롱초롱한 형님은 무한 부지런함과 긍정적인 태도로 부창부수, 마치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하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잘하시고 항상 밝고 여유 있는 두 분의 푸근한 모습을 보면 덩달아 편안해진다.
딸이었다고 하셨나? 아들이었다고 하셨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상대 사돈댁 앞으로는 200여 개에 달하는 엄청난 축하 화환이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데 시숙님 접수대 앞에는 남양유업에서 보내온 화환이 달랑 하나. 안 되겠다 싶어서 혼주인 시숙님이 직접 나서셨다. 꽃 배달원들에게 하신 말씀.
"그어(거기)만 놓지 말고 여어(여기)도 좀 놓아 보소."
그리하여 신랑 신부 양가 모두가 화환으로 뒤덮였다.
"그래 노이(놓으니) 을마나 좋노?"
연신 싱글싱글이시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지혜의 경험담을 덧붙이신다.
"마아, 뭐든지 모르면 되는 기라."
"술 먹고 들어와서 '어디서 누구하고 먹었노?' 하면 '모른다.' '얼마나 먹었노?' 해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드러누운 채 윗도리 벗겨줄 때 어깨 쪼끔 들어주고 바지 벗겨 줄 때 궁디 (엉덩이) 쪼끔 들어서 도와주면 되는 기라."
"시숙님, 진짜 모르셨습니까?"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것도 모른다 아이가."
하하하.
뒤숭시럽고 게으르다는 아내의 지적에 그 말 떨어지기 바쁘게, 말에 콩고물 묻기도 전에 바로, "그렇다."라고 수긍하신다. 그러자 형님의 말이 또 즉시 따라붙는다.
"그래도 성격 하나는 정말 좋다."
옆에 계시던 진동 형님도 바로 한마디 거드신다.
"우리도 성격 하나는 진짜 좋다."
시숙님 두 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깊어진다. 홀짝홀짝 마시는 맛있는 매실주에 취하고 두 시숙님들의 행복한 부부 이야기에 취해서 박장대소, 웃고 손뼉 치며 즐거웠다.
고성 읍내 음식점에서 나와 다시 진동 형님 댁으로 가는 바닷길 드라이브. 6월 초순의 따끈한 햇살 아래 바다도 바람도 겹겹이 다른 색깔과 모습을 드러내고 초록의 산들도 모두 다 반짝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안내판이 무색하지 않다. 바다와 산을 끼고 고불고불 이어지는 길을 20여 분 차로 달렸다. 형님이 내놓으신 가벼운 음료를 앞에 두고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오손도손, 도란도란, 하하호호.
이제는 만남을 마감하고 일어서는 시간. 미리 준비해 두신 햇마늘 두 망태기와 햇양파 두 망태기가 푸짐한 햇살을 받으며 축담 위에 놓여 있다. 우리 집 텃밭에서 생산한 것도 제법 된다고 하니
"서울 가면 아아들도 있으니 마이 필요할 끼다. 꼭 실어 가라."
강경히 권유하신다. 그리고 어깨를 껴안으며 말씀하신다.
"인자 언제 다시 보겠노? 옆에 있는 것만 해도 든든했는데ᆢ."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잡은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지난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힘이 든다. 이 지상에서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본능의 속삭임 때문이리라.
2020년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