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 실습
다친 지 일주일 되는 2월 22일, 토요일.
여고 동창 세 명이 집으로 왔다. 손에 들려 있는 각종 먹거리들. E는 동네 재래시장엘 들러 왔다며 한 꾸러미 장을 보아왔다. 육개장용 소고기, 무, 콩나물, 고사리. 코다리찜용 코다리, 무시래기. 싱싱한 해초 곰피 한 다발과 집에서 구웠다는 건강 오트밀 빵 두 개.
싱크대 위에 펼쳐놓고 바로 조리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C는 깔끔한 성격과 야문 손매로 옆에서 유능한 도우미가 된다. 나는 식탁 반대편 그들의 등 뒤에서 한쪽 의자에 깁스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 입으로 한몫한다.
"도마 어디 있어?"
"응, 저기."
"칼은?"
"고춧가루는?"
"찧은 마늘 양념은?"
"큰 냄비는?"
한 마디만 일러줘도 남의 부엌살림을 알아서 척척 잘도 찾아낸다.
다듬고 씻고 자르고 끓여 완성해 낸 오늘의 주요 요리는 뜨끈하게 끓여진 육개장과 연한 무시래기 깔린 매콤한 코다리찜이다.
팔팔 끓는 뜨거운 물속에서 잠깐 사이 자르르 윤이 흐르던 갈색 옷을 방금 돋아난 싱싱한 초록으로 바꿔 입은 곰피. 금세 뚝딱뚝딱 만들어진 새콤달콤 초고추장을 만나 싱싱하고 달콤한 매력만점 바닷맛을 선물한다. 고슬고슬 전기압력밥솥에서 방금 나온 검은콩밥은 대부분 소분되어 냉동고로 들어가고 쪼끔만 남아 식탁 위에 자리 잡았다.
가게 앞, 늘어선 줄이 길다는 E아파트 지하상가 죽집과 떡집에서 H가 배달해 온 톡톡한 팥죽과 쫄깃쫄깃 영양떡. 동짓날 한 솥 가득 끓여 내던 어머니의 구수한 손맛과 속에 영양재료들을 가득 품은 매끈한 맵시를 자랑한다.
한겨울 식탁 위를 화사하게 등불 밝히는 노란 참외와 초록 턱받침을 앙증맞게 찾아 걸친 빨간 딸기는 C의 손에 들려왔다. 깎고 씻고 차려내며 할머니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풍성해진 식탁 앞에서 대화들도 다채롭다.
"꼭 우리 옛날 생활관 실습할 때 같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학교 안에 있는 가정생활관에서 2박 3일 동안 상주하시는 실습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의식주 생활 실습 교육을 받았다.
60명 정원이었던 그 무렵, 반별로 차례가 되면 열 명의 학생들이 그곳에서 먹고 자며 등하교를 하였다. 먼저 다녀온 아이들의 재밌고 신기한 일화들을 전해 들으며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들이었다.
첫날, 엄마, 아버지, 장남, 차남 ᆢ, 장녀, 차녀 ᆢ, 여덟 자녀, 열 식구의 자리매김을 의논 맞춰 결정한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구매 목록 메모지를 들고 학교 앞 골목시장으로 장을 보러 간다. 찬거리랑 과일을 사 와 저녁을 지어먹고 선생님에게서 의식주 가정생활 전반에 걸친 실습교육을 받는다.
국민소득 백 단위를 넘지 못했던 6,70년대, 일반가정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웠던 전기밥솥, 전기청소기, 프로판가스 조리대, 계량용 조리 기구들의 사용법을 배우고 익혔다.
둘째 날, 저녁 식사 후에 준비해 온 한복으로 갈아입고 그날 당직 선생님을 초대하여 다과를 차려내고 큰 절을 올렸다. 손님 접대 예절 교육이다. 먼 이국 문물 같았던 홍차 티백을 예쁜 커피세트 잔에 걸쳐 뜨거운 물로 우려내는 것조차 신기했던 옛날 이야기다. 밤 늦은 시간, 학교 전담 사진사 아저씨가 오셔서 많은 단체 사진, 개인 사진을 찍는 축제의 날이기도 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조반을 준비하여 먹고 치우고 청소를 하고 도시락을 싸서 지도 선생님의 검열을 받은 후에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운동장 하나 거리에 있는 교실. 지적받은 문제점들을 후다닥 바로잡노라면 미처 매지 못한 세일러복 칼라를 한쪽 손에 움켜쥔 채 양말도 못 신고 우르르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까르르 창공을 향해 날려 보내던 10대 소녀들의 푸르렀던 웃음.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로 두 끼 집밥 식사를 해결했다. 어둑해진 시간, H와 C는 귀가를 서두르고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E는 남았다. 우리 집에서 하루 묵어갈 것이다. 뒷정리를 하고 영화를 골랐다. 기계 다루는 데 무심한 나를 대신해 능숙한 손놀림으로 리모컨을 재빠르게 작동시켰다.
고르고 골라 선택한 영화, <Time together>.
헤드헌터직에 몸담은 치열한 직장생활과 백혈병 환자 어린 아들이 있는 힘든 가정생활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가장의 깊은 갈등과 고난을 그려낸다. 할리우드 영화의 주된 소재, 주제가 되는 가족 사랑은 항상 우리를 강하게 몰입시킨다.
느린 속도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뻗정다리를 한 나는 익숙한 안방 침대를 차지하고 E는 두 개의 비어 있는 방을 마다하고 거실을 택했다.
적당한 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다.